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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박사와 함께하는 ‘어린이 프로파일러 설록의 사건 일지’〈9〉수사에 참여한 설록과 친구들의 프로파일링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증거 모아 12단계로 그려본 범죄 현장…범인은 두 사람이다

“자, 본격적으로 사건 분석을 시작해볼까?”

조 분석관이 사건 현장 사진 마지막 슬라이드를 닫으며 설록에게 시선을 보냈다.

“네, 우선 피해자 분석을 해보겠습니다. 43세 남성으로 직업은 검사. 2년 전 이혼하고 혼자 살며 자녀는 없습니다. 키 176㎝, 몸무게 75㎏으로 건장한 체격이고요. 범죄 피해 위험성은 첫째, 그동안 수사나 기소했던 사건에 불만 품은 자들의 보복 가능성. 둘째, 이혼 등 사생활과 관련된 치정이나 원한 가능성. 셋째, 돈을 노린 강도 피해 가능성 등을 우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오은우]

조 분석관은 설록이 분석한 피해자의 특성을 컴퓨터에 입력한 뒤 스크린에 띄웠다.

“다음으로 사건 현장 특성 분석은 누가 해볼까?”

조심스럽게 손을 든 대홍이가 그동안 메모해온 공책을 펴들자 홍주가 역시 공부벌레는 다르다며 감탄했다. 대홍이는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이곤 분석 내용을 발표했다.

“사건 현장은 피해자가 살고 있던 오피스텔로 자물쇠를 부수거나 유리창을 깨는 등 외부에서 강제로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복도 CCTV 분석 결과 사건 당일 총 4명이 방문했는데, 그중 2명은 안에서 문을 열어줘서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리고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많이 흘린 피해자가 쓰러져 사망해 있었고, 뭔가를 찾기 위해 뒤진 것처럼 어지럽혀져 있었습니다. 또 피 묻은 발자국들과 피가 아닌 흙이 묻은 발자국이 발견되었습니다.”

“아주 잘했다. 당장 경찰관으로 채용해도 되겠는걸?”

조 분석관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칭찬을 하고는 대홍이가 분석한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이제 조금 깊이 들어가 볼까? 시신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에는 어떤 것들이 있지?”

이번엔 홍주가 질 수 없다는 듯 “저요!”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오른쪽 손목에 칼에 깊이 찔린 상처가 있고, 피가 많이 흘러나왔어요. 얼굴과 가슴에도 멍이 무척 많았고요. 분석관님과 설록이의 토론 내용을 추가하자면, 의자에 오랜 시간 묶인 채 일방적으로 맞다가 손이 풀린 다음 일어서서 칼에 오른 손목을 깊이 베인 후 쓰러져 사망한 것 같습니다.”

조 분석관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리듬을 타며 경쾌해졌다.

“역시, 부모님이 모두 경찰관이라 홍주도 정확하고 날카롭구나.”

조 분석관의 눈은 이제 진혁이를 향했다. 친구들의 분석에 구경꾼처럼 감탄의 눈빛만 보내던 진혁이가 당황하며 말문을 열었다.

“저, 저 말인가요? 전 그냥 축구 경기를 할 때 상대팀 선수들 관찰하는 것처럼 키랑 신발 크기만 기억하는데요…. 현관문 404호 표지판 높이가 167.5㎝, 처음에 들어갔던 택배 아저씨 헬멧이 그보다 한 10㎝ 정도 높아 보였으니까 키는 173~178㎝ 정도. 공격수나 미드필더에 맞는 체격이었고요. 그 다음 들어갔던 모자 쓴 신사 아저씨는 그보다 조금 더 커서 180㎝ 정도, 중앙수비수나 골키퍼 포지션에 어울리는 키죠. 그리고 베란다 쪽에서부터 찍힌 흙 묻은 발자국은 265㎜, 같은 크기와 모양의 피 묻은 신발자국도 발견되었어요. 그리고 좀 더 큰 270㎜ 크기의 피 묻은 구두 자국도 발견되었죠.”

처음에 당황했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또박또박 말하던 진혁이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분석을 이어갔다. “그런데 좀 이상한 부분이 있어요. 모자 쓴 신사가 들어갈 때는 180㎝ 정도 키에 마른 체격인데, 나올 때는 5~6㎝ 더 작고 통통한 체격으로 변했어요. 다른 사람이라는 얘기죠.”

설록과 홍주, 대홍이 모두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진혁이의 분석 결과를 입력한 조 분석관이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왜들 놀라니? 축구 선수는 축구만 잘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구나. 어떤 분야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은 기본적인 관찰·비교·종합·분석 능력을 갖추게 된단다. 특히 진혁이 같은 축구 선수는 키나 발 크기 등에 대해 남다른 관찰력이 있지.”

진혁이가 조금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한 가지 더…. 마지막에 피해자 이무중 검사의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나온 남자의 키나 체격은 이 검사가 아니라 모자 쓰고 들어갔던 신사와 비슷해요. 결국, 이 사건은 처음 상자를 들고 방문했던 택배 기사가 어떻게 현관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서 모자 쓴 신사의 옷을 입고 다시 나왔느냐에 대한 답을 푸는 것이 열쇠입니다.”

범죄의 재구성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을 정확하고 치밀하게 분석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프로파일링의 기본!”

설록이 진혁이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조 분석관은 아이들의 분석 결과를 정리한 뒤 빈 화면을 띄웠다.

“자, 그럼 이제 현장에 남긴 범인의 행동증거를 통해서 범행을 재구성해볼까? 우선, 범인은 현장에 어떻게 들어왔을까?”

아이들과 조 분석관은 프로 축구 명문 팀간 대결처럼 생각과 말을 막힘 없이 주고 받으며 논리와 지혜를 모아 구체적인 범행의 모습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① 범인들은 이무중 검사가 귀가하는 시간을 알고 미리 준비 및 계획을 해 뒀다.

② 처음에 택배 기사를 가장해서 방문한 ‘범인 1’이 10분간 머물면서 이 검사를 제압한 뒤 어떤 조치를 취하고 나왔다.

③ ‘범인 1’이 현관 CCTV에 찍히지 않는 곳을 통해 다시 이 검사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④ 모자를 쓴 ‘범인 2’가 현관 출입문을 통해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⑤ ‘범인 1’이 ‘범인 2’의 옷을 입고 현관 출입문으로 나왔다.

⑥ ‘범인 1’은 현관 CCTV에 찍히지 않는 곳을 통해 다시 이 검사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⑦ 두 범인은 이 검사를 의자에 묶은 뒤 최소한 3시간 이상 때리고 상처를 내면서 괴롭혔다. 분노나 복수·원한·치정 같은 감정 때문에 마구 공격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한 것으로 보인다.

⑧ 도중에 방문한 택배 기사는 서류 봉투만 두고 돌아갔고, 피자 배달부는 문틈으로 피자만 건네고 돈을 받아 갔다.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

⑨ 탁자 위에 놓여있던 두 개의 컵과 피자를 다 먹고 빈 상자만 남은 모습 등으로 보아 두 명의 범인은 이 검사를 고문하다 원하는 답을 쉽게 얻지 못하자 도중에 피자를 시켜 먹고 휴식을 취해 가면서 오랜 시간 고문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⑩ 이 검사 시신 옆에 떨어져 있는 작은 스위스 칼과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 떨어진 전화 수화기 등으로 판단해 보면, 범인들이 지치고 경계심이 느슨해진 새벽에 이 검사가 주머니에 있던 작은 스위스 칼을 꺼내 결박을 풀고 전화로 신고를 하려던 것으로 추정된다.

⑪ 넘어지고 부서진 의자와 벽에 뿌려진 혈흔과 바닥에 떨어진 혈흔 등을 종합해 볼 때, 전화를 걸려던 순간 범인들이 발견하고 달려와 격투가 벌어졌고, 그러다가 범인이 휘두른 칼에 이 검사의 손목에 깊은 상처가 생겨 많은 피가 흘렀고, 결국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⑫ 범인들은 범행에 사용한 칼과 이 검사를 결박한 끈 등을 모두 모아 가져갔다. ‘범인 2’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마치 이 검사가 살아서 외출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이 검사의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현관문으로 나갔다. ‘범인 1’은 현관 복도 CCTV에 찍히지 않는 장소로 나간 것으로 보인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용의자는 누구?

완전범죄를 노린 아주 치밀한 범행인 것 같다며 대홍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홍주가 단호하게 “완전범죄는 있을 수 없어.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진혁이 또한 여전히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음료수를 마신 컵이나 문 손잡이 같은 곳에 지문이 찍혀있지 않을까요?”라며 의견을 냈다.

“아주 좋은 지적이다. 지금 과학수사대 CSI에서 정밀 분석을 하고 있단다. 범인들이 장갑을 끼고 범행을 한 것으로 보이고, 장갑을 벗고 건드린 곳도 도주하기 전에 수건 같은 것으로 닦은 흔적이 있다. 지문을 검출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단다.”

안타까움과 조심스러움이 담긴 조 분석관의 대답에 설록이 강한 의지를 담아 웅변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더욱 프로파일링을 통해 범인들의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죠. 그래야 그들이 가져간 범행도구, 피해자의 피가 묻은 칼이나 손목 피부조직이 묻어있을 끈, 그리고 오랜 고문을 거쳐 이 검사에게서 빼앗아 간 어떤 물건 등 증거를 추적하고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용의자… 라고 하죠? 의심 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요? 그들을 빨리 찾아 조사해야죠!”

다급한 목소리로 외친 홍주를 향해 조 분석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설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강력팀 형사분들이 용의자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수사를 하고 계실 거야. 그런데 프로파일링을 하면서 용의자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그 용의자의 특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분석을 하지 못하게 되지. 그래서 분석관님이 우리에게 용의자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주지 않으신 거야.”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늘 너희와 함께 분석한 프로파일링 결과 범인들의 특성과 범행 동기, 범행방법, 검거회피와 증거인멸 수법 등에 대해 보다 명확한 그림이 그려졌다. 이제 정리한 내용을 강력팀에 전달하면 용의자들 중에서 이 분석결과에 가장 부합하는 자들에게 수사력을 집중할 수 있지.”

조 분석관의 설명에 설록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에 강력팀이 용의선상에 올린 사람들 중 프로파일링 결과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없다면 다른 제3의 용의자들을 찾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고요.” 조 분석관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석관님, 범죄수사, 그리고 프로파일링, CSI, 몹시 어렵고 복잡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요!” 홍주가 양쪽 볼이 모두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진혁이도 자기가 뛰었던 축구경기 못지않게 긴장되고, 스릴 넘치고, 흥분된다며 동의했다.

“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지식과 논리력·추리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느꼈어요. 이제까지는 엄마·아빠가 시켜서 억지로 학원에 다니고 싫다고 생각하면서 공부를 했지만, 앞으론 정말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홍이가 주먹을 굳게 쥐고 말했다. 흐뭇한 아빠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은 조 분석관이 아이들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어준 뒤 프로파일링 내용을 정리해 e메일로 보고하겠다며 컴퓨터로 돌아갔다.

과연, 범인은 누굴까? 다른 증거들을 모두 없애고 도주하기 전에 검거할 수 있을까? 어느덧 창밖에는 제주도의 푸른 밤이 아름다운 붉은빛 노을과 경쟁하듯 섞이고 있었다.

표창원 박사는… 1966년생. 범죄심리학자. 탐정 셜록 홈스에 매료돼 경찰대학에 진학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경험하고 전문적인 범죄수사를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 1997년 엑서터 대학에서 범죄학 박사를 받았다. 한국 최초 범죄심리분석관으로 활동하다 2001년 경찰대 교수로 임용, 2012년까지 재직했다. 퇴직 이후 표창원의 범죄과학연구소를 열고 범죄심리학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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