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망하자 인천서 뗏목으로 금강에 이르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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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만경평야를 가로질러 이리에서 군산으로 쭉뻗은 4차선의 길을 30분쫌 달리다 보면 야산으로 둘러싸인아담한 동네가 길 오른편에 나선다·평강채씨들의 집성촌인 옥구군성산면창오리. 옥구군엔 성산면과 임파면만해도 4백여호가 넘는 채씨가 살아대성으로 행세한다.
입향조는 6세 채양생. 여조유신인 양생은 이성계의 조선이 들어서자 화를 피해 아들 왕택을 데리고 인천에서 뗏목믈 타고 서해를내려와 군산에 이르렀다. 그는 만경평야의 젖줄 금강을 20리쯤 거술러 올라와 산세가 수려한 대명산 아래에 삶의 터를 잡았다.
당시에는 육로보다는 금강을 이용한 뱃길이 수월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실증한 셈이다.
넓은 호남평야의 들머리에 위치한 마을은 조선시대 식량보급의 주요병참기지였다는 것이 8대째고향을 지키며 축산업을 하고있는 채규달씨(60·옥구군성산면창오리491)의 말.기름진들에 농사지어 비교적 유족하게 살아온 채씨마을의 현재과제는 85년으로계획된 수동식전화의 다이얼화가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덧붙인다.
이곳에서 나는 질좋은 왕골로 만든 완석이 특산품.연초재배와 논농사를 함께 하는 주민들외 연간소득은4 백 만 ∼ 5 백 만원 선.
한편 인천채씨들은 경북상주·문경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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