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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7) 제80화 한일회담 대일 경제단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정부가 「하또야마」 수수정권의 극렬한 반한정책에 맞서 지난 회에서 언급한바와 같은 보복책을 고육지책으로 내놓긴 했으나 그것은 근본적인 보복책이 될수 없었다.
당시의 언론들은 정부가 취한 조처를「대일단교」라는 제목으로 보도했으나 그것마저 난센스였다.수교도되지않은 사정에 단교라는 것은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취한 조처에 대해 우선 일부 우리 언론이 실익이 없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몇몇 신문 사설이 대일경제단교를 해보았자 일본은 별로아쉬울게 없지만 우리는 당장 해산물등의 대일수출이 막혀 오히려 타격을 받는 쪽은 우리가 될것이라고 지적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이야 우리 수출구조의 90%이상이 공산품이고 록히 중화학및, 중공업제품이 60%이상읕 차지하는 상황이며 또 연간 2백억달러를 훨씬 상회하고 있지만 당시의 수출주종목은해산물과 일부 광물제품뿐이었다.따라서 대일해산물수출의 길이 막힌다면 우리경제에 미치는 타결이 결코 작다할수 없는 형편이었다. 55년의 총수출액이라고 해봐야 1천7백63만달러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우리의 대일경제단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한원조액중 4천만달러규모를 그들 제품으로한국에 팔수있게 되어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산업발전을 통해 안정된 일본을 만들고 그일본이 동북아에서 공산주의와 맞서도록 하기위해 대한원조액중 일정액 규모의 물자를 의무적으로 일본제품을 구입하도록 조건을 불였던 것이다.
정부는 이 규정을 이행하지 않을 궁리를 해봤으며 또 김현철재무장관은 미국과의 협정위반을 하지않고도 대일물자구입을 하지않을 방도가 있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 의무규정은 반드시 이행돼야할 것이라고 강력히 견재해와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행동범위는 제약될수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정부는 대일경제보복조치를 취한지 10일만인 8월27일 완화조치를 취해 그야말로 태산명동서일필격이 되고말았다.
즉 대일무역의 완전금지에서 선별적 허용조치로 바뀌었다.
이렇게되자 55년 하반기는 한일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고 평화선을 둘러싼 양축간의 신경전만이 팽팽해져갔다.
일본측에서도 실력으로 평화선을 돌파하겠다고 위협했고 우리측은 그에맞서 이형근대장 (연합참모회의의장)이 제트기를 출격시켜서라도 일본측의 평화선침범을 막겠다고 말할정도로 단호한 의지률 보였다.
양축간에 이같이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지자 이대통령과 프린스턴대학동창인 저명한 일성서본기독교지도자「가가와」 (하천풍언) 씨가 55년12월13일 이대통령앞으로 에 나오는 「다윗」왕의 고사를 인용, 아량읕 베풀어달라고 간곡히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왔다.「가가와」 씨는 12월8일 우선 일본마이니찌 (매일) 신문을 통해 이대통령에게 한· 일관계가 미· 캐나다관계처럼 되어야할 것이라고 호소한바 있었다.「가가와」 씨의 서한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위대한 한국과 일본사이의 평화를 수립하소서. 「다윗」왕은 자기를 죽이려한 「사울」 왕에게 후대를 베풀어주지 않았읍니까.
본인은 각하가 기독교로서「다윗」 왕의 아량을 가지기를 간망합니다. 「사울」왕이「다윗」왕을 죽이려 했던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은 각하에게 고통을 주었고 한국민족을 탄압했읍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본인은 각하에게 사과하는 동시에 기독교도의 양심에 호소해 각하의 관용을 비는 바입니다』
양심적인 일본인도 없지않았던 것이다.솔직하게 그들의 과거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태도였다.
당시 이대통령도 이 서한을 받고즐거운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20일 「가가와」 씨에게 보낸 답장을 통해 종래와 마찬가지의 강경한 대일입장을 천명했다.
마이니찌신문 21일자에 실린 이 서한에서 이대통령은 일본은 문화재와 조선은행소유의 정대준비금을 반환하고 평화선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강조했다.
이대통령은 특히 일본측이 대한재산청구권을 주장하고 한국의 안전을 파괴키위해 공산권과 손을 잡으려한다고 강력히 비난하면서 이러고서야 어떻게 「다윗」 왕의 아량을 베풀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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