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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대박! 대학생 졸업작품 한국 영화계를 흔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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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군대생활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윤종빈(26)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다.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 등 4개 부문의 상을 휩쓸더니 내년 베를린.선댄스영화제 진출도 확정됐다.
이달 초 열린 아메리칸필름마켓(AFM)에서는 싱가포르와 수출계약도 했다.
18일에는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의 15개 이상 상영관에서 정식 개봉한다.
베테랑 감독의 작품도 대작 영화도 아닌, 학생 작품이 이만한 성과를 올리기는 유례가 없다.
윤 감독과 주연배우 하정우(27).서장원(22)씨를 함께 만났다.

군대 체험담 통해 가부장적 사회 비판

보통의 대한민국 남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군대 얘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에 비친 군대의 모습은 한마디로 '사람 잡는 곳'이다. 화장실에 집합해 고참에게 얻어맞고 원산폭격을 한다든지, 말년 병장이 이등병을 성추행한다든지, 고참의 괴롭힘과 애인의 변심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한다든지 하는 장면들이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군대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한국 남자들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질서에 길들여지는 것은 군대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라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다. 윤 감독은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서 살아가려면 어떤 억압과 강요를 받는지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국제영화평론가협회는 이 영화를 지난해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올드보이'(감독 박찬욱)와 비교하면서 "군복무 기간에 겪는 경험을 통해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을 새롭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지난달 부산영화제에서는 전회 매진되며 뉴커런츠특별언급상.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PSB(부산방송문화재단)관객상도 받았다.

유명배우 2세들 개런티 안 받고 참여

이 영화에는 유명 배우의 2세 연기자들이 단 한푼의 개런티도 받지 않고 출연했다. 탤런트 김용건씨의 아들 하정우(본명 김성훈.유병장 역)씨와 탤런트 서인석씨의 아들 서장원씨다. 특히 연예기획사 싸이더스HQ 소속의 하씨는 이미 영화 '마들렌''슈퍼스타 감사용' 등에서 정식 데뷔한 배우라는 점에서 노개런티 출연은 매우 이례적이다. 현재 SBS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 청와대 경호원으로 출연하며 눈길을 끌고 있다.

이들이 출연한 것은 윤 감독의 중앙대 인맥 덕분. 중대 영화과 98학번인 윤 감독은 싸이더스에 있는 과선배를 통해 중대 연극과 출신(97학번) 하씨를 캐스팅했다. 촬영예산이 2000만원에 불과한 상황에서 개런티를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밝혔지만 의외로 흔쾌히 동의를 얻었다.

하씨는 "독립영화는 재미없다는 선입견과 달리 시나리오도 재미있고 인물의 성격도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며 "소속사에서는 신인급 배우의 기량을 테스트할 기회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학교 연극과 02학번인 서장원씨는 "과선배의 소개로 윤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바로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됐다"며 "개런티 여부를 떠나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모두 중대 선후배들인 다른 배우와 스태프들도 개런티없이 참여했다. 윤 감독도 고문관인 허 일병으로 직접 출연했다.

제작비가 워낙 부족하다 보니 고생도 많았다. 윤 감독은 "합숙 촬영 때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학교 선후배들의 비좁은 자취방을 전전하는 것은 예사였다"고 토로했다. 하씨는 "돈을 받기는커녕 내 돈을 써가며 찍었다"며 "기름값과 고속도로 통행료는 물론 스태프들 밥값을 대신 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씨는 육교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을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기억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 통제가 잘 안 돼 36번이나 다시 찍었다"며 "이때 피운 담배가 두 갑이 넘는다"고 털어놓았다. 제작비의 한계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화질이다. 윤 감독은 "학교에서 빌린 6㎜ 디지털카메라는 일반 가정용보다 약간 나은 정도였다"고 아쉬워했다. 극장의 대형 화면에서는 사람들의 이목구비가 약간 흐리게 보일 정도로 화질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좋은 작품 성공 보장하는 시스템의 힘

이 영화의 기획이나 시나리오가 제 아무리 훌륭했더라도 영화진흥위원회를 비롯한 한국 영화계의 체계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한국에도 배우나 감독의 지명도와 관계없이 작품만 좋으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윤 감독은 지난해 초 시나리오와 이력서 등을 들고 영진위를 찾았다. 영진위의 독립영화 제작지원금을 신청하기 위해서다. 경쟁률은 약 10대 1. 김대현(영화감독) 심사위원장 등 6명의 심사위원은 이 영화를 포함해 16편을 지원작으로 선정했다. 이렇게 지원받은 1000만원과 윤 감독이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받은 상금 500만원, 개인 돈 500만원을 합쳐 제작비를 마련했다.

올 초 중대 졸업영화제에서 상영한 이 영화는 마침 영화제에 참석한 부산영화제 관계자의 눈에 띄었다. 그 결과 "신인감독의 연출력이 눈부시다"는 찬사까지 들으며 부산영화제의 유일한 경쟁부문인 '새로운 물결'부문에 초청받았다. 지도교수인 이현승 감독은 영화 제작.배급회사인 청어람과 윤 감독을 연결시켜줬다. 덕분에 극장 개봉을 위한 후반작업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윤 감독은 다시 영진위의 문을 두드렸다. 극장 개봉을 위한 '예술영화 마케팅 지원사업'에 신청서를 내기 위해서였다. 여기서도 심사를 통과해 9000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영진위가 관리하는 전국 예술영화 전용관 체인을 통한 개봉이 확정된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멀티플렉스 체인인 CGV와 메가박스도 일부 지역에서 상영을 결정했다.

윤 감독은 "영진위라는 기관이 없었다면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극장 개봉까지 성사돼 관객과 만나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영화는 지금 이렇게 커가고 있다.

글=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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