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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화해·평화·소망을 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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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념하게 되는 내년에 로마 바티칸의 「요한·바오로」2세 교황이 방한하는 날짜가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내년 5월3일에 교황이 우리나라에 도착하여 5일동안 머무르게된다. 이 일정이 발표되자 내년에 있을 일인데도 우리나라 각 신문이 1면 머리기사로 대서특필하고있다. 한국 민족을 5천만 인구로 볼때 2백만명의 천주교신자는 전체 인구의 4%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벌써부터 우리나라 전체사회가 교황의 한국방문에 커다란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교황이 온세계 6억 천주교 신자들의 통솔자인 때문일까, 바티칸시국도 하나의 정부형태이니 한나라의 원수가 우리나라를 방문한다는 때문일까.
한 권력체제의 수반이란 신분으로 본다면 교황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꼽히는 미국대통령 보다 미약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는 바로 최근에 한국을 다녀간 미국대통령의 경우보다 교황의 방한에 훨씬높은 관심도를 나타내고있다. 이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날 이 세계의 현실을 놓고서는 도무지 「책임자」가 없다. 미국의 대통령도, 소련의 제1서기장도 책임자가 못된다. 그들은 오히려 거의 무제한적으로 핵무장경쟁을 벌여 인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그렇다고 유엔사무총장이 책임자인 것도 아니다. 그자리는 점점 어느 정도의 중재 능력마저 잃어가고 있어 누가 유엔사무총장인지 조차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이 무책임 상태가 현재 세계 현실의 가장 큰 재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질적으로 세계의 한 정신적 지도자를 찾는다면 교황이 첫번째로 손꼽힐수 있다. 그는 본질적이고 도덕적인 기반 위에 있기 때문에 책임감을 통감하기도 한다. 그 책임은 다름아닌 세계평화의 촉진이다.
이점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교장에게 매우 큰 비중을 두어 관심을 나타내게 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 관심을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곧 교황에 대한 기대가 된다. 그러나 이 기대에는 또한 우리 스스로의 매우 사려깊은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전제를 이해하고나면 아마도 우리가 기대한일들을 우리 스스로가 감당하고 실현해야한다는 귀결에 이르게 될수도 있다.
우리는 안이하게 교황으로부터 어떤 선물을 받을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는 한 특출한 개인이 아니다. 그는 2천년의 그리스도교 전통과 역대 교황좌에 축적된 본질적 원리위에 서있다. 그는 구체적인 일의 직접적인 집행자가 아니며 군림하는 권력자도 아니다. 그는 가타콤바 지하 공동묘지에서 맨손으로 기어나와 다만 사랑의 힘으로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사람들의 후예를 대표할뿐이다.
우리가 「교황」이라고 부르는 용어는 「마태오·리치」신부가 1595년 중국에서 한문으로 써낸 책 『천주실의』안에서 라틴어의 Papa(아버지)를 교황 또는 교종이라고 옮긴데에서 연유한다. 그는 결코 황제가 아니므로 차라리 「교종」이라고 불러야하는데 옛날부터 잘못된 용어 사용 관례가 답습되어 오고있다. 실제에 있어서 오늘날 교황은 공식 문서를 발표할때에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감목(Episcopus·주교) 아무개…」라고 자기신분을 표현한다.
교황은 또 특정종교의 수위권자로 독선이나 호교적 아집을 가지고 세계의 여러 곳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천주교(가톨릭)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선의의 사람들」은 하느님만이 아는 섭리속에서 구원될수 있음을 믿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 가톨릭의 통일성이라는것도 「초자연적 사랑안에서의 통일」을 추구할 뿐이며 「각 민족의 땀밑뿌리에서 솟아나는 재능과 특성은 옹호되어야 한다」고 천명되고 있다. 여기에 천주교 토착화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는 동양 재래의 유교에 담겨있는 천명관념에 그리스도 신앙을 연결할수있었고, 조선조실학계열 학자들의 자발적 신앙초래로 민족 정신사안에서 명분을 지닐수 있었다.
더우기 1791년(신해년)으로부터 1873년의 대원군 은퇴때까지 80여년 동안에 무려 1만여명의 순교자를 냈다는 사실은 민족사에 있어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신라때 불교신앙을 위해 이차돈이 순교한 일과 조선조 초기 사육신의 순절만 대체로 기억될뿐 천주교 신자 1만여명의 순교는 사회적으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장기간의 가혹한 박해뒤에 천주교가 은둔의 길을 걸어온 때문일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그숱한 천주교 순교자들중에서 1백3위가 성인품에 오르게 되어 한국 천주교회의 줄기찬 역사가 온세계 사람들을 새삼스레 경탄케하고 있다.
내년에 「요한·바오로」2세 교황이 방한하여 1백3위 성인의 익성식을 한국에서 직접 거행하는것은 순교성지 참배의 의의를 띠게되는 것이다. 이에 이르러 우리민족사의 면모는 한결 밝은데로 진출하는 계기를 얻을수있기를 우리는 기대하게 된다.
가톨릭교회는 양명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동서냉전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주저없이 비판할점은 비판한다. 「제도가 인간을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제도를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것이 교황좌의 선언이다.
현대세계의 어려운 모든 문제는 개방·화해·대화·도덕적인 힘으로서의 공권력·공동선·일치·평화·구원에의 지향에서 개선되고 쇄신되어야 한다는것이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일관된 관심사로 되어있다.
제2차세계대전후 동서냉전의 가장 불행한 전초지가 되어있는 한국, 하느님의 진리에 따라 살고자한 1만여명 순교자의 피가 배어있는 이땅, 수천년 수난의 민족사가 「진리를 빛으로, 정의를 목표로, 사랑을 원동력으로」하여 화해·평화·통일을 성취하는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 소망을 성취하는데 대한 본질적인 원리와 격려는 교황이 가지고 올수 있다. 그러나 그 소망의 성취자체는 우리스스로의 실천에 달려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문학평론가·수원대교수 구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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