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읽기] 우리 도덕교육 ‘착한 노예’ 만 길러 왔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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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무엇이 훌륭하게 사는 것일까. 철학자 김상봉 교수(전남대)가 현행 도덕 교육을 성토하고 나섰다. 신간 '도덕교육의 파시즘'(도서출판 길)에서다. 김 교수는 제법 도발적이다. 현행 교과서로 상징되는 도덕 교육을 매섭게 질타한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서울대에 국민윤리교육과를 신설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도덕 교육은 착한 노예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한 번도 긍지 높은 자유인을 기른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김 교수의 말대로 우리의 도덕 교육은 "외관상의 변화에도 전두환 시대 이래 한걸음도 진보하지 못했을까". 한국 도덕 교육의 심각한 파탄 상태를 걱정하며, 새로운 형태의 윤리 교육을 내세우는 김 교수의 입장에 대해 두 명의 전문가가 공감과 비판의 글을 보내왔다. 향후 한국 사회의 걸림돌로 꼽히는 보수-진보의 갈등을 풀어가는 문제와도 맥이 닿는 대목이다.

그렇다
"악에 저항하는 것도 도덕인데
선악 분별력은 안 길러주고
권력에 순종하는 인간만 양산"

국어 과목에서는 국어를 가르치고, 국어를 배웠으면 국어를 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학 과목에서는 수학을 가르쳐야 하고, 수학을 배웠으면 수학을 잘해야 한다. 그런데 도덕 과목은 '도덕'을 가르치는 과목이고, 도덕을 배웠으면 '도덕적이라야 한다'면 다들 갸우뚱한다.

해방 이후 60년 동안 도덕을 가르쳐 왔지만 이 국가와 사회가 도덕 교육 덕분에 도덕 수준이 높아졌다는 말은 극히 적다. 국민 대부분은 도덕 시간을 도덕이 아니라 예절 배우는 시간쯤으로 여긴다. 도덕 시간에 '도덕'을 가르치지 않고, 윤리 과목이 또 다른 암기 과목이라는 것은 교육 현장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덕 시간에 정작 가르치지 않고 있는 바로 그 '도덕'이란 무엇인가?

김상봉 교수는 '도덕 교육의 파시즘'에서 너무나 당연히 이렇게 말한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소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이다. 그런데 악은 자기로부터 타인에게 행해질 수도 있지만 거꾸로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나에게 가해질 수도 있다. 따라서 내가 타인에게 행할 수 있는 악을 멀리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인 만큼, 마찬가지로 타인이나 사회가 나에게 가하는 악에 저항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도덕적 의무다. 그러나 한국의 도덕 교과서는 자기가 타인이나 사회에 대해 행할 수 있는 악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말하면서도 타인이나 사회 또는 국가가 개인에게 가할 수 있는 악에 저항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악에 저항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도덕 교과는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데 '나'에게 닥쳐 온 악에 저항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 한국의 도덕 교과서는 '내'가 순종한 악이 그대로 '남'에게도 통하도록 해주고, 그래서 어디에서도 저항받지 않은 악이 이 사회와 국가에서 점점 커가는 것을 보면서도 무감각하게 체념하도록 일조한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한국의 도덕 교육은 부당한 권력에 대한 은밀한 숭배의 배양기가 된다.

'도덕 교육의 파시즘'은 독재 정권 시절부터 바로 그런 도덕 교과서를 근 30년 동안 만들어온 '서울대학교 국민윤리교육과'를 실명으로 지목한다. 물론 이 학과에서 나쁜 짓을 하라고 적극적으로 가르친 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쁜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가려내어 그런 것을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도덕적 분별력을 가르치는 것은 너무 자주 잊어왔다. 그른 것과 올바른 것 사이의 긴장을 무시하고 훈육 조로 가르치려 드는 바람에 도덕책은 아주 재미없게 돼버렸다.

다행히 올해부터 시작된 7차 교육과정 개정 작업에서 도덕 교과서 개편은 이 학과의 소관에서 떠나 전국 철학계와 윤리교육계, 그리고 현장 교사들의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는 중이다.

도덕 교육은 어디까지나 도덕성에 대한 강한 철학적 자신을 바탕으로 해야만 제대로 이루어진다. 그런 도덕 교육의 철학이 확고하다면 김 교수의 책은 우리가 다시는 돌아가지 말아야 할 '파시즘의 추억'이 될 것이다.

홍윤기(동국대 교수.철학)

아니다
"법·질서는 공동체 유지의 기본
무한자유는 남의 자유 짓밟아
복종·절제야말로 ‘주인의 도덕"

김상봉 교수의 책에서 느낀 것은 그의 도덕관과 정치관, 그리고 국가관이 매우 독특하다는 것이었다. 또 영국의 중세 철학자 윌리엄 오컴의 '유명론'(실체보다 이름으로 사물을 설명하려는 태도)을 떠올리기도 했다.

책 전반부에 등장하는 '파시즘'이나 '노예도덕'의 의미가 얼른 머리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성보다 선정성이 묻어나는 말들이 생뚱맞게 다가왔다. 예컨대 저자는 애국심에 관한 도덕교과서의 설명을 논리와 이성이 부족한 것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칸트주의자인 저자가 '파시즘' 같은 사회과학적 용어를 얼마나 정제된 형태로 사용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성을 강조하는 그의 입장과 묘한 역설과 대비를 이룬다.

진보주의자들은 흔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체제나 사상을 파시즘이라고 매도하는데, 김 교수도 이런 지적 유행을 따라가고 있어 유감이다. 하고많은 비판적 용어 가운데 선택한 것이 왜 하필 '파시즘'이나 '노예도덕'일까. 그런 이름으로 전교조 도덕교사나 일반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했다면, 지성의 천박함 일지언정, 진정성은 아니다.

김 교수의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정치적 동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에서 있음 직한 보편적 인간이나 칸트의 '목적의 왕국'에서 세계시민으로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갖게 한다.

과연 우리는 그런 존재인가. 하이데거의 말대로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일정한 민족과 국가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이 우리다. 공동체의 구성원인 이상, 그 특정한 공동체를 가꾸고 일구어나갈 도덕적 의무와 정치적 책무가 있다. 또 그 책무는 이 땅을 살아간 조상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이 공동체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무도 있다. 당연히 이 공동체에는 보편성의 개념으로만 파악하기 어려운 특정한 질서와 규범이 요구된다. 법과 질서의 개념을 단순히 억압이라고 생각하거나 법과 질서에 복종하는 태도를 전체주의적 태도라고 낙인 찍는다면, 도덕적 결벽증이거나 정치적 감수성의 결여가 아닐까.

필자의 생각에 김 교수는 도덕주의자이기는 하나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 '철학적 무정부주의'가 전적으로 틀렸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겠지만, 문제는 있다. 인간은 자유인이기는 하지만 '자유의 역설'도 상기해야 한다. 모두가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면 아무도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절제가 요구되고 법에 대한 복종도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절제나 복종의 덕목은 '주인의 도덕'일뿐 '노예의 도덕'은 아니다. 또 절제나 복종의 덕목을 내면화한 사람이 불의에 복종하는 사람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며 치열한 삶을 살아온 지성과 교육자들을 독설로 매도하는 것은 자신도 마시고 있는 샘에 침을 뱉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 책이 독설과 소피즘(궤변)으로 주목을 받을 순 있겠지만, 이는 지성의 정도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저자가 그토록 싫어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한 인기영합 방식이 아닐까.

박효종(서울대 교수.국민윤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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