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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박해로 잊혀진 작곡가들 가슴 아린 선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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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43년 이탈리아 밀라노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탔다. 포탄 세례를 받은 라 스칼라 극장도 3년간 문을 닫고 개.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몇 년 후 밀라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를 걷어내고 새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극장 근처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철제 트렁크가 발견됐다. 안에는 음표를 빼곡히 그려넣은 오선지 꾸러미가 들어있었다. 가방이 철제라서 악보가 고스란히 살아남은 것이다.

악보는 65년 작곡자 파울 클레츠키(1900~73.사진)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제네바에서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 중이었다. 베를린에서 푸르트벵글러의 조수로 활동한 그는 베토벤.말러 해석에 정평이 나있다. 미국 댈러스 심포니 상임 지휘자도 지낸 바 있다.

그러나 그가 한때 촉망받던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클레츠키는 폴란드 태생으로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23세 때 데뷔작 '현악4중주'를 출판할 정도였다.

유태인인 그는 나치 독일의 횡포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작곡을 접었다. 33년 독일을 탈출한 클레츠키는 이탈리아.러시아를 거쳐 스위스로 망명했다. 밀라노에서 러시아로 떠나면서 악보 가방을 건물 지하실에 남겨둔 것이다.

클레츠키는 악보 가방을 끝내 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창작열이 식어버린 작곡가'로 알려지는 게 두려워서였다. 2000년 미국의 음악학자 티모시 잭슨(노스텍사스대 교수)이 취리히의 한 도서관에서 이를 발견해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있다. 잭슨 교수는 클레츠키를 비롯, 아놀트 멘델스존(1878~1941), 라인하르트 오펠(1878~1941) 등 나치 독일의 박해로 금지되거나 잊혀진 음악가들의 작품을 복원해 서양음악사의 공백을 메우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2002년에는 댈러스 심포니가 클레츠키의 '교향곡 제2번'을 초연했다.

나치 박해로 '잊혀진 음악가들'의 작품이 28일 오후 7시 한양대 음대 백남음악홀에서 국내 초연된다. 바리톤 정록기, 바이올리니스트 로버트 다비도비치, 피아니스트 조셉 바노베츠, 강희정 등이 클레츠키의 '바이올린 소나타'(세계 초연), 아놀트 멘델스존, 라인하르트 오펠의 가곡 등을 들려준다. 한국서양음악이론학회 창립 행사로 19일~12월 2일 한양대.서울대.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열리는 '2005 음악이론 페스티벌'의 하나다. 02-2220-1224.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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