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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영화 ‘러브토크’ 열연 배·종·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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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1일 개봉하는 영화 ‘러브토크’의 분위기는 무척 우울하다. 두 시간 내내 주인공들은 쓸쓸한 표정으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진심을 담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마음의 상처가 더 깊어질까 두려워 서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라는 낯선 도시의 황량한 풍경은 이들의 외로움을 더해준다.
극적인 사건도 별로 없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매우 좋다.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선
인물 묘사가 뛰어나고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허문영 프로그래머)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미묘한 표정과 말투, 절제된 동작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잘 살린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이다. 그 정점에는 올해로 데뷔 20년을 맞은 배종옥(41)이 있다.

"사건보다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 영화예요. 영화 '여자, 정혜'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윤기 감독의 특성이기도 하죠. 극적인 사건 중심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은 낯설어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관객 동원보다 새로운 영화를 선보인다는 데 의미를 뒀어요."

그녀가 맡은 써니는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 마사지 숍을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이민자다.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기 위해 남편과 자식까지 버렸다. 하루종일 벌거벗은 남자들을 상대하며 온갖 일을 다 겪는다. 그녀 말대로 '망가진 여자'다. 마사지 장면에서는 '첨밀밀'의 여주인공 장만위(張曼玉)를 떠올리게 한다.

"마사지 연기에 신경 많이 썼어요. 잘하는 사람에게 따로 배웠죠. 서툴게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첨밀밀'은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해 5~6번이나 봤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영화 찍는 동안에는 연기에 몰두해 그런지 그 생각을 못했어요."

혼자 외롭게 살아가던 써니는 어느 날 라디오 심야 토크쇼를 듣다 전화기를 든다. 영신(박진희)이 진행하는 '러브토크'라는 프로그램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의 익명성을 이용해 속마음을 살짝 드러낸다. "솔직하게 내 마음을 표현한다는 거, 이제 나한텐 정말 어려운 일이 된 거 같아요. 내가 받을 상처가 두려워요.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두려워져요."

그러나 전화를 끊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다시 마음의 문을 꼭꼭 닫는다. 써니의 집에 세들어 사는 젊은 남자 지석(박희순)에게 관심이 있지만 표현에는 지극히 인색하다.

"써니는 조금만 마음을 열면 다른 사람들과 화해할 수 있는데도 안 하죠. 그러면서 스스로 답답해 해요. 손만 한번 내밀어도 될 텐데…. 그런 게 우리가 사는 현실인 것 같아요."

'러브토크'는 총 40회 촬영 중 1회를 빼고 모두 로스앤젤레스에서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홍보.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순제작비는 15억원으로, 한국영화 평균 순제작비의 절반 정도다. 예산을 아끼기 위해 배우와 스태프 모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하루 12시간 촬영하는 강행군을 두 달간 이어갔다고 한다.

"무모한 도전이었죠.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4~5시간밖에 못 자는 날도 많았어요. 현장은 계속 바뀌는 데 적응은 안 되고…. 영어 대사 부담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어요. 그만큼 영화에는 감독.배우.스태프들의 피와 땀이 어려있어요. 사전작업을 보다 철저히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후반작업에서도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영상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어요."

그녀에 대한 이윤기 감독의 믿음은 각별하다. 이 감독이 "영화 인생에서 배종옥이란 배우를 만난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배종옥의 연기는 돋보인다.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젊어서는 멋모르고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은 오래 하면 연기도 쉽게 하는 줄 알지만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선을 넘어서야 하는 부담이 있거든요. 그런 생각이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겠죠. 이 감독과는 올 초 TV문학관을 하면서 만났는데 서로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녀가 1985년 21세의 나이로 데뷔한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많은 여배우가 20대에 전성기를 누리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져 가지만 그녀는 아니다. 아직도 영화.드라마에서 주연급으로 활동하는 흔치 않은 40대 여배우다.

"나이에 자유로운 여배우는 없겠죠. 그렇지만 배우에게도 나이테 같은 것이 있어요. 젊어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부분이 나이 들어서는 자연스럽게 나와줘요. 앞으로 코미디나 액션영화도 해보고 싶어요. 진지한 배우가 웃기면 더 우습지 않겠어요?"

글=주정완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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