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APEC] 아시아는 거꾸로 읽어도 아시아, 태평양은 파도 쳐도 태평한 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그래 정말 그랬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시아는 중국인의 중화(中華)의 땅이 되기도 하고 일본 사람이 주먹을 쥔 대동아 공영권의 바다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서쪽에서 검은 배가 밀려와 하늘을 찢는 대포 소리로 아시아의 밤은 불탔다. 그래 정말 그랬다. 아시아와 태평양은 서양에서 짐을 잔뜩 싣고 온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5000년 전 헤커타이오스(Hekataios)가 그린 최초의 세계지도를 본 적이 있는가. 거기에는 '유럽'과 '아시아'의 두 땅만이 표시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유럽은 해가 진다는 에레브에서 나온 말이고 아시아는 해가 뜬다는 '아수'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름은 해 뜨는 땅인데도 늘 아시아는 밤이었다. 눈 감고 입 다문 침묵의 밤이었다.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고,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아시아는 깨어진 배. 아시아는 위험한 황사였다. 남들이 보습을 대는 땅 낯선 사람들이 뱃길을 잡는 바다였다. 그러나 어느 날 한 시인의 예언대로 아시아의 등불 한국에 다시 불이 켜지면서 아시아에는 눈부신 아침이 오고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여러 나라가 오순도순 손을 잡고 살아가는 길이 트였다. 그래서 지금, 태평양의 파도가 끝나는 남해의 밝은 바닷가 부산에 나부끼는 스물한 개의 깃발 ! 그리고 한국의 두루마기 차림으로 이 고요한 아침 뜨락에 나들이 온 아시아 정상 스물한 사람의 얼굴들 !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를 위해서 전 세계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아시아인의 눈들이 일제히 화살표처럼 이곳으로 향한다. 다투지 말고 빼앗지 말고 잘 산다고 오만하지 말고 못 산다고 비굴하지도 말며 서로 가슴을 열고 심호흡을 하면 정말 그렇다. 유럽 연합보다도 더 크고 부자 마을을 만들 수가 있다. 테러를 막자. 핵의 위협에서 조류 인플루엔자(AI)의 불안에서 그리고 부패와 공해와 우리를 더럽히는 자잘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미래로 가자. 그러면 평등한 아시아는 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아시아가 되고 평화로운 태평양은 파도가 아무리 쳐도 태평한 바다가 된다.

이어령 본사 고문

◆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특별섹션은 중앙일보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경태 원장)이 공동 기획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