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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협력 지나치면 담합 … 내부고발이 확실한 파괴 무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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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호 28면

2014년 2월 15일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1000m 결선에서 1위로 들어온 뒤 러시아 국기를 두르고 있는 빅토르 안(안현수) 선수. 러시아로 귀화한 안 선수의 활약 후 빙상경기연맹은 대표선수 선발과 관련해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국가적 기준에서는 부당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인간은 협력에 목말라한다. 협력하면 서로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해 답답해한다. 지구온난화도 세계 각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면 해결될 문제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5년 2월 16일 지구온난화라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교토의정서가 발효됐다.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지구온난화 방지에 공감하고 합의했다는 점에서 교토의정서는 세상을 바꿨다는 평가도 있다. 과연 지구온난화 문제가 해결됐을까.

⑪ 협력과 담합 사이

교토의정서가 효과 못 본 이유
설명의 편의상 이 세상에 두 나라만 있고 온실가스 배출을 계속할지, 아니면 감축할지를 각자 결정한다고 하자.

두 나라 모두 자국 경제 침체 대신 성장을 원하고 지구환경 또한 훼손되지 않기를 원한다. 두 국가의 선택에 따라 네 가지 결과가 나오는데, 그 결과에 대해 각국이 좋아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A국: 중간A > 양호 > 훼손 > 중간B
B국: 중간B > 양호 > 훼손 > 중간A

B국이 기존 배출량을 유지할 때 A국도 유지하면 지구환경이 훼손되고, 이와 반대로 A국만 감축하면 지구환경은 별로 좋아지지 않으면서 A국 경제는 침체된다. 즉 B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지 않을 때는 A국도 감축하지 않는 것이 자국에 나은 선택이다.

다음 B국이 배출량을 감축할 때를 살펴보자. A국도 감축하면 지구환경이 양호해지지만 A국이 감축하지 않는다면 성장이라는 자국에 최선인 결과를 얻게 된다. 즉 B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더라도 A국은 감축하지 않는 것이 자국에 나은 선택이다.

B국이 어떤 선택을 하든 A국은 배출량을 감축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전략이다. B국도 동일한 전략적 계산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결과는 쌍방이 배출량을 줄이지 않아 지구환경은 훼손된다. 양국 모두 훼손된 지구환경보다 양호한 지구환경을 더 선호함에도 말이다.

이는 각자 자기 이익에 맞게 행동했지만 모두에게 손해인 결과다. 그래서 이를 딜레마로 부른다. 죄수 딜레마 게임이 그런 딜레마의 전형적 스토리다. 노벨 수상자를 포함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수십 년 동안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해왔다.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먼저 협력한 후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for-tat)’ 혹은 보상·보복을 하는 전략이 상호 협력을 유도한다는 게 밝혀졌다. 예컨대 A국은 일단 먼저 감축하되 그 이후엔 B국의 선택 그대로 따르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B국은 자신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면 A와 B 모두가 감축해 양호한 지구환경이 되고, 자신이 감축하지 않으면 A와 B 모두의 비협력으로 지구환경이 훼손된다는 걸 알게 된다. 쌍방의 비협력에 의한 ‘훼손’보다 상호 협력에 의한 ‘양호’를 더 선호하는 B국이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전략적 사고가 지구온난화 방지에 기여한다.

1997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3차 당사국총회. 이곳에서 합의된 교토의정서는 2005년 2월 16일 발효됐다. [중앙포토]

교토의정서 발효 후 지난 10년을 돌이켜 봤을 때 지구온난화 방지의 실제 성과는 미미하다. 교토의정서는 강제적 의무가 없고 미사여구로 가득한 문서라 많은 국가가 동의한 것뿐이다. 말로는 어느 나라나 지구온난화 방지를 강조한다. 문제는 말뿐이고 실천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교토의정서는 상호 관계가 지속되도록 만들지도 못했고 또 상대방 행동에 따라 보상하거나 보복할 수 있게 만들지도 못했기 때문에 상호 협력이라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협력을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는 미국과 유럽 사회의 오래된 문제의식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거꾸로 왜 특정 집단의 협력(담합)이 지속되고 또 어떻게 담합을 깰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다. 사회에 나쁜 범죄를 저질렀지만 서로 협력(공모)해 처벌받지 않는다면 사회적으론 바람직하지 않다. 범죄자가 서로 배반해 적절한 처벌을 받고 그래서 범죄가 덜 발생하도록 만드는 것이 공익이다.

‘의리’ 붙은 최근 유행어 모두 부정적 의미
협력이나 담합은 일회성 접촉에서 잘 이뤄지지 않고 지속적 접촉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의리는 그런 지속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협력이고 말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사회정의가 이 사람 저 사람 차별하지 않는 탈(脫)공간적 협력 가치라면, 집단 의리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차별해 배타적이고 대신에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 탈(脫)시간적 협력 가치다. 지속적인 관계에서는 배반보다 의리가 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의리라는 수식어가 붙은 최근의 복합어는 모두 부정적이다. 의리 축구, 의리 야구, 의리 쇼트트랙, 의리 산악회, 의리 인사…. 모두 부정적 어감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달로 한국 사회가 더 투명해졌고, 집단 의리를 사회정의보다 우선시하는 경향도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꼭 1년 전인 2014년 2월 15일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1000m 결선에서 러시아 대표 빅토르 안(안현수)이 금메달을 땄다. 안현수는 500m와 5000m계주에서도 금메달을 러시아에 안겨줬다. 이에 비해 한국 남자대표팀은 노메달이었다. 안현수가 러시아 대표로 한국 선수와 레이스를 펼칠 때 적지 않은 한국인이 안현수를 응원했다. 귀화한 동아시아 선수들을 출신국 사람들이 비난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당시 여론은 안현수가 한국 대표 선발전 시기와 방식을 포함해 불공정한 과정의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이런 여론에 정부도 가세해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슬로건하에 스포츠계 개혁을 추진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열린 월드컵 쇼트트랙에서 남자대표팀은 과거 실력을 되찾았다.

안현수는 파벌에 의존한 선수가 아니었다. 안현수는 내부 고발성 글을 사이버공간에 올리기도 했다. 안현수 부친도 내부 고발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소속팀 성남시청 빙상팀이 해체되고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한 안현수는 러시아 귀화를 선택했다. 한국에 계속 있더라도 앞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한 안현수의 선택이었다. 한국 빙상계를 내부 고발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러시아 귀화는 일종의 내부 고발로 작동했다.

내부 고발자 불이익 줄이는 장치 필요
내부 고발이 배반으로 낙인찍히지 않고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정받으려면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였고 집단의 내부 절차가 부당함을 증빙해야 한다. 소치 올림픽은 결과적으로 3관왕 선수 대신에 노메달 선수들을 한국 대표로 선발한 절차가 부당했음을 증명했다.

의리 체육계 내에서야 병역 특혜 같은 여러 혜택을 고루 나누기 위해 대표 선수를 선발했다고 스스로 정당화하겠지만 이는 국가적 기준에서는 부당한 행위다. 현행 법령은 체육 병역혜택의 근거로 국위 선양을 들고 있는데, 군필자나 미필자를 구분하지 않고 최우수 선수들로 국가 대표를 구성한 후 국위 선양의 성적을 내면 미필자에게 그 특기를 활용해 병역 의무를 수행하게 한다는 취지다. 실력 있는 군필자보다 실력 없는 미필자를 우선 선발하는 행위는 군필자를 차별하는 동시에 국위 선양에도 맞지 않다.

군필자에 대한 차별보다 더 추악한 담합도 있다. 실제로 집단의 비윤리적 가치관과 행동에 동참하지 않아 따돌림을 당할 때도 있다. 왕따를 당하면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콤플렉스는 남을 따돌리는 사람들의 것이 더 크다. 혼자서 남을 지배할 수 없으니 나쁜 짓을 해서라도 무리에 기대어 그 콤플렉스를 해결한다.

양심선언과 내부 고발처럼 조직에 대한 배반이 사회적으론 오히려 긍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담합 구도에서 이득을 얻는 자가 이탈할 동기는 크지 않다. 대신 담합으로 피해를 본 자의 고발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고발이 외부에 알려질 때 담합에서 오는 혜택 또한 줄기 때문에 그 담합은 대부분 와해된다.

소집단의 이익 때문에 전체 이익이 훼손되지 않게 하려면 내부 고발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해서 내부 고발의 불이익을 줄여야 한다. 담합 사실을 스스로 신고하면 과징금을 면제해 주는 리니언시, 그리고 사건 규명과 범인 체포에 기여한 공범에게 형량을 감면하거나 기소하지 않는 플리바기닝도 그런 제도다.

지구온난화 방지처럼 모두가 참가하는 것이 좋은 협력도 있고, 또 패거리처럼 다수에게 피해를 줘 와해돼야 할 담합도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죄수 딜레마 상황에서의 상호 협력을 유도하는 전략이고, 내부 고발은 담합을 와해시키는 전략 가운데 하나다.



김재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연구소 National Fellow,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신뢰』 『DMZ 평화답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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