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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통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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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김연수씨 축사의 요지는 미당 문학상 수상자인 문태준 시인을 향한 우정과 사랑이다. 문 시인과 중.고교 동창이었던 김 작가는 1990년대 초 이미 문 시인보다 먼저 등단한 선배 시인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뒤늦게 습작시를 들고 나타난 친구가 문태준이다. 정성껏 시를 봐준 김 작가는 불안해하는 벗을 다독였다. 곧 등단할 터이니 염려 말라던 그의 덕담이 힘이 됐을까. 문태준씨는 이듬해 등단했다. "그때부터 전 시에 흥미를 잃고 소설을 써야만 했습니다." 김연수씨의 한마디가 내뿜는 훈훈한 기운은 수상자의 가슴에 안긴 들국화 향기보다 더 짙었다.

자기 재능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회의에 빠져 고민했을 20대의 문태준씨에게 자신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김연수씨는 보물이었을 것이다. 험하고 외로운 세상을 건너는 데 그보다 더 큰 재산이 있을까. 김연수 작가는 '축사 전문가'란 행복한 별명을 얻었다. 이 자리 저 자리로 불려다니며 축하주를 받는 그는 인간 들국화처럼 보였다.

후배 격려차 판에 끼었던 소설가 조정래씨가 한 달 전쯤 타계한 친구를 떠올린 까닭도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지 싶다. 경제학자이자 에세이스트요, 저널리스트였던 정운영(1944~2005)이 그다. 마음을 터놓고 뜻을 나눌 만한 친구로 정운영을 의지했던 조정래 작가는 "내가 먼저 그의 관을 들게 될 줄은 몰랐다"며 추억 하나를 풀어놓았다.

"정 형과 같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당연 코스로 서점을 들렀어요. 정 형이 한 코너에 가더니 평소의 그답지 않게 들뜨는 거예요. 뭔가 싶어 봤더니 혁명가 체 게바라에 관한 책만 모아놓은 곳인데 당시 거기 꽂혀 있던 것이 54종이나 돼요. 정 형이 그걸 글쎄 망설임도 없이 몽땅 사더니 흐뭇한지 빙긋 웃더라고요. 책값 계산에 쓴 신용카드가 한도액을 초과해서 정 형이 한국에 돌아온 뒤 고생하던 일이 눈에 아직도 선한데…."

조정래씨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놈의 책만 안 샀어도 그가 좀 더 오래 살았을 거란 생각을 해요. 그래도 누가 말릴 수 있었겠어요. 그에게 책은 밥이자 혼인 걸."

정운영이 남긴 체 게바라의 책 한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를 기록하는 혁명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손가락에 꼭 맞는 장갑을 끼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고수해야 한다는 점이네." 날카로운 칼럼니스트 정운영의 글과, 민중사'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의 글은 '손가락에 꼭 맞는 장갑을 낀다'는 점에서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정치 폭력을 비판하는"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홀로 걸어가던 두 사람을 묶어준 것은 아마도 이런 공감이었을 것이다.

서로 헐뜯고 깎아내리느라 목이 쉬고 눈이 벌건 세상에 이들의 우정은 맑은 눈물 같다. 진정한 벗을 만난 문태준 시인은 미당 문학상 수상작 '누가 울고 간다'에서 노래한다.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정재숙 문화부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