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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쟁

재정 안정인가, 복지 확대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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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논쟁의 초점

‘증세 없는 복지’가 이 시대 화두가 되고 있다. 여기에 현재 재정 상황으로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 맞붙으면서 또 다른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증세해서라도 복지를 확대할 것인지, 복지를 구조조정해 재정 부담을 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복지 확대냐 재정 안정이냐의 문제는 현재 어느 한 쪽이 기울지 않을 만큼 팽팽하다. 양쪽의 입장을 들어봤다

‘증세 복지’ 재정 개혁 걸림돌

옥동석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민주화 이후 많은 정권은 대선과 인수위 과정에서 재정 총량의 한도를 인식하지 않았다. 성장률을 회복하면 재정 여력은 충분히 생긴다거나 아직까지 국가 재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등 여러 덕담에 취해 2월 말 정부 출범 직전까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다. 3월 초 정부조직과 인사를 정비하고 새로운 열정으로 국정을 설계할 때 비로소 국가 재정의 한계가 거대한 산처럼 새 정부의 앞길을 막아 선다.

 이때부터 집권세력은 재정 여력을 확보하는 은밀한 유혹에 빠져든다. 그것은 국민에게 ‘세금 인상’의 분노 어린 고통을 주지 않고 ‘재정사업 축소·폐지’의 살기 어린 갈등을 조장하지 않으면서 재정 여력을 확보하고 복지도 늘리는 것이다. 그 유혹은 곧잘 생소한 용어로 표현되지만 실상은 한결같다. ‘당장 지출하고 그 부담은 미래로!’ 이 유혹은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은밀한 덫이었음이 5년 후 또 다른 정부가 출범할 때 밝혀지고 만다.

 이런 폐습을 타파하고자 현 정부는 공약가계부를 발표했다. 향후 5년간 세출 조정 75조원(매년 15조원), 세입 확충 60조원(매년 12조원)으로 총135조원을 마련해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이전 정부가 수립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세출 조정으로 재정 배분을 변경하고 세입 확충으로 재정 총량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에 맞춰 복지의 틀도 구상했다.

 그런데 정권 출범과 동시에 두 가지 측면에서 공약가계부에 심각한 도전이 나타났다. 첫째는 이전 정부가 수립한 2013년의 예산과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재정 수입의 예측에 중대한 문제를 인식한 것이다. 국세 수입과 세외 수입이 비현실적으로 과다하게 계상된 것이다. 이 때문에 새 정부는 다급하게 세입 부족 12조원을 보전하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둘째 측면의 도전은 새 정부가 공기업 부채를 통한 비정상적 재정 운용을 더 이상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있다. 사실 이전 정부에선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재정사업을 공공기관에 떠넘기는 불합리한 관행이 팽배했다. 주요 공기업 10개를 기준으로 김대중 정부는 20조원, 노무현 정부는 120조원, 이명박 정부는 160조원의 재정사업을 공기업을 통해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중독성 강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재정 지출을 감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약가계부의 내용은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다음과 같이 조정됐다. 우선 이전 정부에서 과다 계상된 국세 수입과 재정 수입을 매년 약 25조∼35조원만큼 하향조정했다. 이는 다양한 세입 확충으로 확보한 재원을 세입 결손에 우선 충당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추가적인 재정규모 확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기업을 활용한 비정상적 재정 운용의 관행을 감안한다면 매년 약 30조원의 지출감축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약가계부의 기본 내용은 유지되고 있으나 그 정도와 규모는 여전히 많은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다. 비과세·감면 축소, 지하경제 양성화, 금융소득 과세 강화라는 세정 개혁의 이 해묵은 과제는 세율 인상과 세목 신설 같은 증세의 유혹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공기업을 감안한 실질적인 재정 총량이 감소함으로써 세출 구조조정의 절박함은 더해지고 있다. 산업·개발국가에서는 특정한 산업·기업·직업, 그리고 지역과 연계된 특정한 개인을 보호했다. 그러나 복지국가는 일반적 속성의 일반적 개인을 보호한다. 우리는 어떻게 큰 갈등 없이 복지국가의 지출구조를 만들어낼 것인가.

 한국형 복지국가라는 우리 시대의 과제는, 고부담-고복지와 저부담-저복지의 선택에 한정되지 않는다. 세정 개혁과 지출 조정의 미시적 과제 가 더 복잡하고 어렵다. 세율 인상과 같은 증세를 손쉽게 선택하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개혁의 절박성을 이완시키는 것은 아닌가. 분주파부(焚舟破釜)의 의지가 없다면 세정개혁과 재정개혁의 첫걸음조차 내딛기 어려울 것이다. 복지 역시 세정·재정 개혁과 함께 가야 한다.

옥동석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복지는 사회적 분배 기능

신영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원장

최근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현 정부는 증세 없는 복지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으나 집권 여당 대표는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며 정치인이 그러한 말로 국민을 속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일각에선 복지를 늘리면 그리스나 아르헨티나처럼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한다. 과연 복지는 나라를 망치는가.

 2011년 기준 우리나라 공공사회 복지 지출은 국민총생산 대비 약 9.1%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인 21.7%에 비해 반도 안 된다. 당연히 복지를 감당하기 위해 국민은 더 많이 부담한다. 우리나라의 조세와 사회보장 기여금을 합한 국민부담률이 2011년 기준 국민총생산 대비 25.87%로 OECD 평균인 35.24%에 비해 많이 낮다. 미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 국가는 대부분 고복지(高福祉)-고부담(高負擔) 국가다. 물론 부담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복지 수준을 높이는 것은 국가의 존망을 흔들 수 있다.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90%까지 높였던 그리스가 좋은 예다.

 문제는 적정한 복지수준을 찾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국가의 모든 역량을 경제에 집중했다. 복지수준은 저열했다. 그러다 97년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비로소 실업자·빈곤층 구제를 위한 복지제도가 본격화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복지에 많은 예산이 투입됐다. 그러나 불평등 정도는 심화됐다. 노동과 자본의 세계화·자동화에 의한 고용 없는 성장,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국제적 환경 변화는 수출주도형인 우리나라 경제에 그대로 전이돼 자본력이 있는 계층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됐지만 저소득 근로자는 더욱 열악한 상태에 내몰려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장애인 언니를 돌보는 데 한계를 느낀 젊은 동생은 세상과의 연을 끊었다. 치매 부모를 감당키 힘든 자식은 현대판 고려장을 감행한다. 이러한 극단적 사례가 아니더라도 150만 세대가 경제적 이유 때문에 건강보험 보험료를 체납해 병원을 이용하기 어렵다. 노인 빈곤율,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단연 높다. 복지 수준을 높여야 한다. 복지는 소비가 아니다. 불평등한 분배는 교육 기회를 제약해 인적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저해하고 세대 간 계층 유동성을 제약하며 사회적 갈등구조를 초래해 궁극적으로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특히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큰 우리나라의 경우 공평한 분배구조는 장기적으로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내수 기반 확충을 통해 고용 증대는 물론 경제의 안정적 성장과 재정 건전성 유지를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복지 확대에 필요한 재원 마련과 복지제도의 효율성·효과성 제고가 그 다음 숙제다. 우리나라는 사회보험기여금의 55%를 고용주가 부담하는 데 반해 OECD 국가들은 평균적으로 고용주가 사회보험기여금의 약 63%를 부담해 상대적으로 자본가의 부담이 더 높다. 소득세 누진성은 OECD 회원국 중 일본과 폴란드를 제외하고 우리나라가 가장 낮고 소득세의 수직적 공평성 또한 2000년대 중반 이후 계속 악화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노동자의 소득분배 몫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저소득 노동자들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세제 구조조정이 재원 확보 수단이 될 수 있다.

 세제 구조조정을 통한 복지 확대가 현재 우리의 갈 길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향후 저출산 및 고령화가 지속되고 저성장이 예견되는 만큼 중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복지의 틀을 재정비하는 것은 필요하다. 영국 사회정책학자 티트머스의 주장이 향후 우리나라 복지 정향을 설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보편주의 원리 위에 선별주의가 결합되는 복지 방식이 더 큰 사회적 위험에 노출된 사람에게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한다는 점에서 더 공평하고 의미 있는 분배의 원리다.”

신영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