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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대학-그 내력과 실상(오기완(방송공사전문위원)씨 논문서)|김정일 후계체제 강화위해 지위격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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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82년 9월 현재, 북한에는 모두 l백86개대학이 있다. 김일성대학은 그중 유일한 종합대학이다. 김일성대학은 그 이름만큼이나 북한에서 가장 중심격이며 명실상부한 최고학부로 자처하고 있다. 더구나 김정일을 중심으로한 김일성대학출신 파벌조차 만들고 있다고한다. 평양모란봉·대성구역일대 총1백56만여평방m의 대지위에 l만7천여평의 학생(야간통신방송대생 5천명 포함)을 모아 가르치며, 소위 「민족간부」 양성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이 「교육현장」의 내력과 실상은 어떤것인가. 북한문제전문가 오기완씨(한국방송공사전문위원·김일성대학 1회졸업)가 최근 『북한』지 및 『아시아 공논』(일본어판)에 기고한 『실록 김일성대학』을 통해 그 실체를 밝혀본다. <편집자주>

<내력>
45년11월초 북한주둔 소련군 정치사령부를 찾아간 김일성·김책·안길·강건 등이 정치사령관 「로마빈코」소장과 무슨 얘기끝에 대학 창설문제가 재기됐고 소련주둔군사령부는 이를 승인했다. 45년11월18일 「대학건설기성회」란 조직이 결성됐다.
46년 봄이 되자 잠잠했던 대학창립에 대한 소문이 다시 고개를 쳐들면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결정으로 「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는 발표가 있었다.
46년7월8일, 종합대학 창립에 관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결정 제40호가 발표됐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46년9월1일 평양에 북조선종합대학을 창립한다.
▲평양 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대동공전)를 대학으로 승격, 종합대학에 편입시킨다.
▲종합대학의 명칭은 「김일성 종합대학」이라 칭한다 등.
8월중순의 입학시점엔 8백명 모집에 2천5백여명이 응시, 2.3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합격한 8백명의 학생은 9월1일부터 수업에 들어갔으나 처음 한달 가량은 우왕좌왕하는 허송세월이었다. 강의자체도 엉망이었다. 강의가 재미없다고 제멋대로 전과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개교 당시 김일성대학의 학부는 경제법학부·역사문학부·물리수학부·농학부·공학부·의학부 등 6개학부였다. 한 학기가 지난 47년2월부터는 운수공학부가 신설돼 모두 7개학부로 늘어났다.
김일성대학의 초대총장으론 김두봉이 임명됐으며 부총장은 박「대학당위원장은 김철 등이었다. 총장인 김두봉은 이름뿐이였고 실질적인 대학운영의 책임과 실천은 모두 부총장인 박일이 맡았다. 박일이란 인물은 소련출신으로 모스크바 론모노소프종합대학 철학과를 졸업한뒤 알마아타대학의 철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해방후 북한에 밀려들어온 많은 소련파 인물중 가장 높은 학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학교수를 한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김일성대학 초대부총장의 자리에 앉혀졌던 것이다.
1946년10월l일. 그러니까 대학이 개교한지 꼭 한달만에 공식적인 개교식이 있었다. 이에따라 김일성대학의 창립일도 10월1일로 됐다.
이날 개교식 주석단에는 그야말로 당시 북한을 주름잡던 내노라하던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일성과 김일성대학총장 김두봉을 비롯, 부총장 박일, 대학 당위원장 김철, 그리고 당과 인민위원회 간부인 주령하·최창익·허가이·오기섭·김책·한설야 등의 얼굴이 보였다. 소련주둔군 군사요원인 「레베주에프」소장과 흔히 정치사령관이라 부른 군사행정부 사령관 「로마넨코」소장, 그리고 용역장교인 강미하일(소련군 소좌) 등의 거만스런 모습도 눈에 띄었다.
뒤이어 북한의 농촌에서는 이른바 「김제원애국미 운동」이 벌어졌다. 황해도 재령군에 사는, 김제원이라는 농민이 김일성대학의 신축공사를 위해 쌀2백가마를 헌납했는데 북한 전주민은 이 모범을 따라야한다면서 이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이것은 북한에서 전개되는 사회주의 경쟁운동의 시초다).

<힘들었던 교수 확보>
김일성대학이 창설되면서 겪은 어려웠던 일중의 하나는 교수부족 현상이었다.
공학부와 의학부는 기존 전문학교를 흡수, 교수진이 그대로 옮겨앉아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신설된 학부는 교수진을 충당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치러야했다.
우선 북한지역에서 차출된 인물로, 북해도제대·농학부를 졸업한 농학박사로서 교수를 맡은 계응상(64년7월 사망)을 비롯해 동경물리학교를 졸업한 물리학교수 오상원. 경도제대를 졸업한 경제학교수 이영순, 하르빈공대를 졸업한 공학박사로서 화학강좌장과 본관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재영, 북해도제대를 졸업한 농학부장 현옥원, 일본대를 졸업한 역사학교수 강장수. 경도제대를 졸업한 생물학교수며 생물학연구소장인 원홍구(70년10월 사망), 일본 동북제대를 졸업한 철학교수 김기석(그는 47년께 월남, 서울시교육위원회위원장을 지냈다), 일본 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한 체육교수 김명복(46년말 월남, 경화대 체육대학장을 지냈다), 북해도제대를 졸업한 수의학교수로서 수의과학연구소장을 맡은 김종희 등이 있었다
교수진확보의 두번째 경로는 남한으로부터 월북해온 교수들을 확보하는 길이었다. 해방직후에 월북했거나 47년의 이른바 남북협상때 월북한 학자들은 대부분 김일성대학으로 배치됐다.
경성제대를 졸업한 역사학교수로서 그후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과학원원사)을 지낸 김석형을 비롯, 일본대학을 졸업한 철학교수 김시중(당 역사연구소소장·철학박사), 경도제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문리대교수를 역임한 물리학교수 도상록(강좌장·과학원 원사),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후 서울대상대교수를 역임한 경제학교수 김한주(농업과학원부원장), 독일에 유학한 고고학교수 도유호(과학원 후보환사), 경성제대를 졸업한 역사학 강좌장 박시형(원사·박사), 경성제대를 졸업한 신남철교수와 경제학교수인 전영식, 그리고 48년 월북한 철학교수 정진석(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장·『로동신문』부주필)과 홍명맥의 장남인 홍기문 등이다(괄호안의 직책은 그후 역임했거나 현재 재직하고 있는 것임).
이들 남한출신 교수들가운데는 아직까지도 북한에서 건재하고있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그것은 이들 교수들의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괴가 대남 심리전을 의식해 이들이 당의 정책을 정면으로 반발하지 않는한 그들을 계속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진 확보를 위한 세번째 경로의 주요 대상은 소련파 교수들이었다. 당시 김일성대학으로선 이 경로를 가장 중요시했다.
당시 제1진으로 해방과 함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제25군을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은 강미하일·오기찬·이봉길·조기천·전동혁·김세·김성화·박기전 등 28명. 이들은 대부분 통역장교로 들어왔다.
제2진은 45년11월말부터 12월초에 걸쳐 들어왔는데 이춘백·박영빈·박봉쌍·허학철·천의완·김단·박길이·한성천 등 50여명이나 됐다.
제3진은 제2진보다 며칠늦게 평양에 도착했는데 그 가운데는 비중이 높은 간부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허가이 박의완 남일 김재욱 김승화 기석복 김열 김찬 방학세 박영 허빈 박창직 박일 태성수 등 북한에서 당과 정권관에서 중요한 직책에않았던 사람들이다.
김일성대학의 초대 부총장인 박일과 2대부총장 태성수, 3대 부총장 김승화는 바로 2진과 3진 속에 포함돼 있었다. 제4진과 5진은 47∼48년 사이에 북한에 들어왔는데 이들중엔 주로 교원출신이 많았다.
이들 소련파 교수들은 부총장 박일과 함께 초기 김일성대학을 운영해 나가고 있을만큼 절대적인 파워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말몰라 촌극>
당시 정치과목으로는 유일하게 「소련공산당사」가 있었는데 모두 소련파 교수들인 박영·박영빈·이용석 등이 맡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우리말 발음이 서툴러 학생들이 알아듣지 못해 교수에게 항변하는 촌극도 자주 빚었다.
그러나 기석복·정률·박길룡 등은 초기부터 유창한 우리말로 「고골리」 「마야코프스키」 「쇼호로프」 등 소련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소개하는 등 폭넓은 강의로 학생들의 인기를 모았다. 특히 정률은 서글서글한 성격에 소탈한 면이 있어 6·25당시 사망한 작가 김사량, 월북 연극인인 황철·홍명희 등과 매우 가깝게 지냈고 홍명희가 일시 휴직하고 있을때 그를 상대로 곧잘 문학잡담의 꽃을 피우기도 했다.
장편서사시 『백두산』의 작가 조기부은 김일성대학 교수직을 끝내 맡지 않았다. 소련파의 거두였던 박창옥과 함께 하바로프스크사범대학출신인 그는 수차에 걸친 당의 요청에도 끝내 교수직을 사양한채 창작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는 6·25당시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발표됐는데 김일성의 미움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암살됐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한동안 나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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