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한 변화가 정권 교체일 필요는 없어. 미얀마가 모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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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북한에 대해 사실상의 체제 보장 카드로 해석 가능한 ‘미얀마식 해법’을 내놓았다. 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시아ㆍ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4일(현지시간) “미얀미의 사례에서 보듯 북한의 변화가 꼭 정권 교체일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러셀 차관보는 이날 워싱턴의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미국은 대북 적대시 정책이 아니라 비핵화 정책을 갖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러셀 차관보는 “군사 독재에서 스스로 변화하고 스스로 개방한 나라들이 있다”며 “미얀마는 그 결과로 국제 사회에서 경제적 지원과 개발 자금이 몰려오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얀마를 두차례나 방문했고, 미얀마 대통령도 워싱턴을 찾았다”며 “미얀마 경제와 생활의 변화, 국제 협력과 지원은 혁명이라는 비용을 치르지 않고 평화적 과정을 거쳐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셀 차관보는 이어 “북한이 6자회담 합의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맞춰 진정성을 갖춰 협상에 나서면 우리는 북한에 존재하고 있는 정부(현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체제)와 협상하겠다는 게 요점”이라고 설명했다.

러셀 차관보의 이날 회견은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달 22일 “북한 정권은 무너질 것”이라고 밝혀 미국의 속내는 정권 교체에 있다는 관측이 대두된 뒤 나왔다. 정권 교체는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온 사안이다. 한미간 북한 급변사태계획에 강경 발언을 내뿜고, 이른바 ‘최고 존엄’을 비판하는 대북 전단에 총까지 쐈던 배경엔 이를 체제 전복을 위한 시도로 간주한 데 있다. 이 때문에 러셀 차관보가 오바마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 사실까지 거론하며 “이를 상상해 보라”고 밝힌 것은 북한을 달래 대화로 이끌려는 설득 카드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 2011년 출범한 민선 정부를 이끄는 미얀마의 테인 세인 대통령은 군부 출신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얀마를 2012년과 2014년 두차례 방문했고, 테인 세인 대통령도 47년 만에 처음으로 2013년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테인 세인 체제가 미국의 외교적 승인과 제재 완화 조치까지 얻음에 따라 한때 고립의 대명사였던 미얀마는 지난해 동아시아정상회의(EAS) 개최국으로 국제 사회에 등장했다.

그러나 미얀마 카드엔 비핵화라는 조건이 분명하다. 러셀 차관보는 “북한은 국제법을 준수하는 대가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며 “그건 될 일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한미 군사연습의 중단을 핵 실험 잠정 중단과 맞교환하자는 북한 제안을 일축한 것이다. 대신 “우리의 요구는 2005년 서명한 9ㆍ19 공동성명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라며 “북한에 돌아갈 혜택을 논의할 전제는 9ㆍ19 공동성명의 첫 문장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이행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이는 북한이 핵보유국이라는 전제 위에서 6자회담을 새롭게 시작하거나 북·미 관계 개선에 나설 일은 없다는 의미다. 성 김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미국의 대북 정책에서 변화는 없다”며 “북한이 진정성 있는 대화를 원하면 우리도 기꺼이 기회를 모색할 것이며 이는 미국의 오래되고 일관된 입장”이라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한편에선 북한의 도발 가능성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 후보자는 이날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남북 간에 관계 개선을 위한 신호들이 있지만 북한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협상으로 미국과 동맹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벼랑끝 전술과 도발을 자행할 가능성이 커 경계를 늦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러셀 차관보도 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잘 알고 있다”며 핵 실험, 미사일 발사, 천안함 폭침과 같은 비대칭적 공격, 은밀한 사이버 공격 등을 들었다. 이로서 미국은 대화와 도발중 무엇을 선택할지 북한에 공을 넘긴 게 됐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g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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