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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국채시장 활성화 바라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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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리나라의 국채시장은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정부의 건전 재정 기치 아래 그 발행 규모가 절대적으로 작았으며, 이에 따라 국채시장의 발전 수준도 크게 미흡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세수가 부족해진 상태에서 금융권 구조조정 등에 필요한 재원 조달을 위해 국채발행이 괄목할 만하게 증가했다. 한편 국채 유통시장에서도 국고채 통합 발행, 국채전문딜러제도 등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고, 국채 선물을 통한 리스크 헤지도 가능해지면서 국고채의 일평균 거래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2000년 5월부터 국채금리(3년만기 국고채 유통수익률)가 회사채금리(3년만기 A+)를 대신하여 지표금리로 사용되면서 국채시장이 채권시장의 중추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내 국채시장은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여 아직도 그 규모 면에서 미흡할 뿐만 아니라, 장기 국채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해 국채시장 전체가 효율적으로 운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 국채시장 활성화에 따른 기대 효과는 매우 크다. 먼저 장기 국채시장은 고령화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빠른 고령화 속도에도 불구하고 안전성과 수익성이 조화된 금융자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고령자의 특성상 은퇴 후 오랫동안 어느 정도의 수익을 추구함과 동시에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장기 금융상품에 대한 수요가 확대되고 있는데,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대표적인 상품이 바로 장기 국채인 것이다. 장기 국채시장은 또한 마땅한 장기 투자처를 찾지 못한 막대한 시중 부동자금에도 새로운 투자 수단이 되어 자금의 선순환 구조의 회복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장기 국채시장이 활성화되면 자본시장에서 장단기 채권 간 수익률 곡선이 형성되어 합리적인 채권 가격을 산정할 수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자본시장 선진화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불안한 국내 경제 구조와 정부의 잦은 시장 개입 등에 의한 국채 수급의 불안정성, 비정상적으로 낮게 형성된 시장금리 수준, 시장 조성 기능을 담당하는 딜러 부재에 따른 중개시장의 낙후성 등을 고려할 때 장기 국채시장이 쉽사리 활성화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장기 국채시장이 활성화되더라도 비효율적 재원 운용, 국가채무 부담 증가 등으로 국민 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미래 재정 지출 수요를 정확히 고려하지 않고 장기 국채를 통해 조달한 자금이 단기 경기부양 과제에 집중될 경우 자칫 재정의 건전성이 악화될 수 있다. 일본은 1990년대 대규모 경기 부양책 집행에 따른 장기 국채발행 확대로 재정적자 규모가 급격히 누적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채무 부담 국가가 되어 오랫동안 장기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일본의 사례는 최근 국가채무가 매우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기 국채시장의 발달은 금융시장 선진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특히 자산운용업 중심의 동북아 금융중심 허브 구축과 고령화 사회 대비를 위해서도 매우 시급하다. 그러나 이런 필요성만으로는 국채시장의 발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하드웨어적인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10년 이상의 장기 예산 계획을 먼저 제시하여 국채 수급의 불안정성을 완화하고, 시장금리 수준이 금융시장이나 경제 상황을 잘 반영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적인 개선을 도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