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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갇힌 지구촌 아이들] 중. 도시 바닥을 구르는 빈민 아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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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남미에서 가장 높은 마을인 페루 라 링코나다 근처의 아네네아에서 알파카 30마리를 키우면서 사는 카르멜라 마마니(24)는 바쁘다.'집 나간' 알파카 한 마리 때문에 이리저리 뛰고 있다. 2개월 전 산 새끼들이 적응을 못 하는지 '가출을 해'매일 잡으러 다녀야 한다. 새끼 한 마리면 한 달치 식량값이라 보통 귀중한 게 아니다. 잉카족의 상징인 '보제라' 보자기로 딸 카롤리나(2)를 들쳐 업고 알파카를 잡으러 뛰는 모습이 날렵하다. 산소가 희박한데도 전혀 상관 없는 모양이다.'너무 빨라 사람같지 않다'고 놀라워하자 '알파카는 내 아이와 같다'며 순진하게 웃는다. 환한 미소 뒤로 만년설이 우뚝하다.

바나나 소년 포스토(12)의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하다. 페루 푸칼파시 베타니아 마을에 사는 포스토는 매일 30㎏쯤 되는 바나나 더미를 머리로 날라야 한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다. 늘 머리가 눌려서인지 키가 1m20㎝밖에 안 된다. 정상이라면 1m40㎝는 돼야 한다. 2년째 이 일을 하는 소년의 삶이 바나나 무게에 찌들어간다.

도시의 바닥에서 아이들은 운다. 페루에서, 에티오피아에서, 캄보디아에서 아이들은 오늘도 가난의 시퍼런 날에 쫓긴다. 페루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동상으로 피부가 거북등처럼 갈라진 아이들이 이 밤도 광산으로 향한다.

마리오(11)·알렉스(5) 형제는 남미서 가장 높은 ‘하늘에 닿은,땅끝 마을’에 산다.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 티티까까로 유명한 푸노에서도 10여시간 오르막 비포장길을 달려야 된다.해발 5800m에 있는 마을 이름은 ‘라 링코나다(La Rinconada). 구석에 박혀 있다는 뜻이다.

비행기 창 밖으로 험준한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이 펼쳐진다.그 높은 곳에 바라크(인디오 오두막) 군락들이 간간이 눈에 띤다.저런 데서 누가 살까? 볼리비아와 접경지인 이 곳으론 금에 빨려 들어온 사람들이 몰린다.

알렉스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돌 깨는 망치 소리 요란한 돌산 옆에서 장난감 포클레인을 갖고 노는 자그마한 사내아이다. 평균 영하 15도. 알렉스의 얼굴은 동상과, 강한 햇살로 인한 화상에 번갈아 시달렸다. 새빨간 뺨, 말린 오징어처럼 얼굴 피부가 굳었지만 천진하다. 아니 만져보니 구두가죽 같다. 안데스 전통음악인 쿠에카스를 흥얼거리는 알렉스에게 포클레인 놀이는 장난이 아니다. 미래의 일터, 광산을 향한 예습이다. 그 미래는 빨리 닥친다. 7살이면 금에 눈을 뜨고, 부모들은 아이를 금광으로 데려간다.

지난 1일, 라 링코나다에서 금광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라콤패르타'. 좁고 가팔라 숨이 턱턱 막히는 깔딱고개다. 적응을 위해 3일째 고산 알약을 먹고, 산소호흡기를 하고도 헉헉거린다. 외지인들에겐 '100m를 있는 힘껏 뛴 뒤 빨대로 숨 쉬는 것'만큼 벅찬 곳이라는게 현지인의 말이다. 오후 5시, 교대시간이다. 북적거리는 일꾼 가운데 알록달록한 보자기에 세 살배기를 업고,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을 신은 로욜라(47)와 광부 모자를 쓴 남편 알프레도 하나리(40)가 있다. 하나리의 손엔 오늘 채굴한 금가루 한 줌을 담은 봉지가 들려 있다. 그 뒤를 마리오와 알렉스가 맨발로 따라온다. 파카를 두 개씩 껴입어도 추운, 얼음이 꽁꽁 어는 날씨다. 알렉스의 발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다. 갈 데 없는 애들은 엄마.아빠를 따라다니다 어느새 광산에 익숙해진다.

실제로 마리오는 방학이면 광산에 묻혀 산다. 하는 일은 금 솎아내기 작업. 깨진 돌들은 트랙터에 실려와 체를 거친 뒤 화공처리 된다. 금 섞인 돌이 든 양동이에 수은을 부으면 금이 분리돼 나온다. 단순해서 곧잘 애들의 몫이 된다.

문제는 수은이다. 작업장 규칙은 장갑을 끼는 것이지만 애들은 맨손으로 양철 수은통을 마구 만진다. 손도 제대로 씻지 않는다. 중금속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셈이다. 벌써 마리오는 머리가 아프고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손이 떨린단다. 금광에서 일하는 15살 이하 어린 소녀들이 기형아를 낳기도 한다.

온종일 그렇게 일해도, 공칠 때가 있고 최대한 골라내야 40g 정도다. 그 대가로 마리오가 손에 쥐는 돈은 4솔 남짓. 1달러가 3솔이다. 마리오는 돈을 몇달씩 모아 학용품을 산다. 또래 아이가 다 그렇다. 다들 학교엔 다니지만 보고 듣는 게 금광이 전부라 공부는 뒷전이다. 알렉스도 형 마리오처럼 금세 돈에 재미붙일 게 분명하다.

미국 NGO '월드러닝'의 가르시아 대표는 "페루에서 학업을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 125만3000명 중 약 10%가 광산으로 향한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도 실업이 심각한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 별 수 없이 금광으로 빠진다. 그나마 금광 때문에 사람이 몰려 통계상 인구는 600명에 불과하지만 실제론 2만 명이 산다. 대통령이 와 본 적도, 정부의 손길도 없는 버려진 도시다.

하늘의 별이 유난히 가깝다. 해발 5800m 밤하늘에 걸린 별은 그물로 딸 만큼 많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 펼쳐지는 삶은 힘겹고 구차하다. 하수구도 없는 시궁창으론 막 도살한 알파카의 피가 뚝뚝 떨어진다. 노천 시장은 더럽고 살기가 떠도는 듯하다. 삶의 1막부터 탄광에 묶인 마리오 형제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누릴 수 있을까.

유엔 빈민 아동 통계
전 세계 '거리의 아이들' 1억 명 추산
폭력.마약.성매매 등에 무방비 노출

유엔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약 1억 명의 아이들이 도시의 거리를 떠돌며 산다. 6000만 명은 가족 부양을 위해 거리로 나선다. 나머지 4000만 명은 가족도 돌아갈 집도 없어 거리를 헤맨다. 이 아이들은 책임 있는 성인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성장에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채 하루를 버틴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교육에서 소외된 탓에 미래 역시 밝을 리 없다. 만성적 가난과 가정 불화에 시달리거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은 결국 도시의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지난 20년간 세계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뤘지만 상대적 빈곤층은 줄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 OECD 국가에서 국가 평균 소득의 절반 이하로 생활하는 '상대적 빈곤층'에 속한 어린이의 비율은 1980년대에 비해 90년대에 오히려 더 늘었다. 국민 중 50% 이상이 18세 미만인 저개발 국가의 상대적 빈곤은 어린이의 삶에 더 큰 위협이다. 페루의 상위 10%의 소득은 하위 10% 소득의 50배에 달한다. 차이가 크다고 하는 미국도 16배 정도다.

보호자와 돈을 찾아 거리로 나선 아이들은 도시의 폭력, 성 착취, 마약, 인권 침해 등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또래들과 집단으로 생활하며 생존을 위해 매춘이나 절도도 주저하지 않는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시의 경우 1000여 명의 아이들이 거리를 배회한다. 그중 절반 이상이 쓰레기 줍기나 구걸로 하루를 보내며 여자 아이들 중 9%는 성매매에 관련된 일을 한다(유니세프). 앙골라.라이베리아.과테말라 등 내전 지역의 아이들은 폭력 속에서 자라나 거리에서 또 다른 폭력을 답습하는 악순환의 덫에 걸려 있다. 도시의 폭력과 굶주림으로 죽는 아이들은 매년 수천 명에 달하지만 이들에게 미치는 도움의 손길은 턱없이 모자란다.

밑바닥 내몰린 아이들
쓰레기 더미서 고철 찾고
돼지 배설물 위에서 자고 …

도시 밑바닥으로 내몰린 지구촌 아이들은 가난에 녹아든다.

◆ 네살짜리 장사꾼=소키(9).산티(4) 자매는 캄보디아의 세계적 관광지, 앙코르와트 사원의 도시 씨엠립에 산다. 등교시간, 자매는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앙코르와트 외곽 바레이 호수의 작은 섬으로 향한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기념품을 팔기 위해서다. 조악한 나무 팔찌,기념 엽서 등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조그만 것이 관광객을 졸졸 따라다닌다.

"언니, 팔찌 예뻐요. 다섯개에 1달러"라고 소리치며 한국인 관광객의 시선을 끌려 안간힘을 쓰는 소키가 안쓰럽다. 산티는 열심히 관광객을 따라다니며 엽서를 들이민다. 운 좋은 날 버는 돈이 5달러 정도. 농사 짓는 부모가 종일 일해도 그만큼 못 번다. 많은 아이가 학교를 떠나 관광지 주변을 떠도는 이유다. 가난은 자매에게 관광객의 지갑을 여는 기술을 가르친 대신 어린시절을 앗아갔다.

◆ 쓰레기 형제=에티오피아 아디스 아바바의 최대 빈민지역 리테타에서 만난 아미수(8).아비지(6) 형제는 쓰레기나 다름없어 보인다. 함석집이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엔 인간과 동물의 배설물이 나뒹굴고, 그것들이 함석집에서 쏟아진 시궁창물과 함께 고여 있는 동네. 그 한켠 산처럼 솟은 쓰레기 더미가 형제의 일터다. 쓰레기에서 고철 조각을 찾아낸다. 손으로 종일 뒤진 두 아이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악취가 진동한다. 그런 꼴로 번 3~4 비르의 돈, 우리 돈 약 500원으로 음식 찌꺼기로 만든'꿀꿀이죽'을 사먹는다. 부모가 있지만 조막만한 함석집, 흙바닥에서 사는 처지라 애들을 돌볼 여유가 없다. 아디스 아바바시에는 절대 빈곤층이 30%가 넘는다.

◆ 돼지와 함께=페루의 쿠스코 인근 농촌에 사는 가리(5.사진 가운데)는 돼지와 산다. 축사가 없으니 '집따로 우리 따로'가 안 된다. 그냥 같이 산다. 맨발로 배설물을 밟고, 날이 추워 수도가 얼면 돼지 분뇨가 둥둥 뜬 우물물을 쓴다. 끓이기는 해도 설사병에 자주 걸린다. 씻는다 해도 저 물에 씻을 테니 깨끗해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 뭔가 탈이 난 걸까. 가리는 자꾸 몸을 긁고 하품도 잦다. 지금은 안데스 고산지대를 휩쓴 건기에 가뭄이라 식량이 부족하다. 그래도 전 재산인 돼지 12마리는 절대 못 건드린다. 고기는 꿈도 못 꾸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쿠스코 인근에 사는 5세 이하 아동 43%가 영양실조에 걸린다.

◆ 특별취재팀

아시아 = 김은하 기자, 최병관 사진가
아프리카 = 안성규 기자, 이창수 사진가
남미 = 이원진 기자, 최재영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사진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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