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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더워야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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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정복자「나폴레옹」이 스스로 손을 들고 물러가게 한 민족이 있다. 무력으로 정복은 했지만 끝내 스페인와 민족정신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회유를 하고 협박도 해봤지만 스페인의 누구도 그에게 협력하는 사랍은 없었다. 총칼을 들고 싸우지도 않았다. 싸움엔 졌다. 하지만 그들이 정신은 비굴할줄 몰랐다. 『세상에 이런 정신의 백성은 보질 못했다』고 투덜대며 천하의「나폴레옹」도 스스로 물러나고 만것이다.
그 이후 세계 어느 나라도 감히 스페인을 넘볼수는 없게되었다. 그들은 영원히 정복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강인함은 어디서 유래한것일까?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줄곰 내 머리를 떠나지않은 의문이었다. 우리가 만약 이럴수있었다면 일본의 식민 통치는 불가능했을 것이요,
지금도 세계열강 누구도 우릴 넘보진 못할것인데-그저 아쉬울뿐이다. 지금 그곳에는 4년동안 비한방울 뿌리자않는 큰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40도를 웃도는 무더위속에 붉은 대지는 이제라도 곧 온 천지가 불바다로 타오를것같이 이글거리고 있다. 그러나 정말 신기한 일은 그나라 어느 누구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볼수 없다. 그 의연한 자세에 존경이 간다. 도대체 이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 말이다. 그리고 저 투우장의 열기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섭게 달려드는 황소앞에 한점 흔들림 없이 버티고 선 투우사 드디어 일격.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구는 쓰러지고, 열사 위엔 붉은 선혈이 낭자하고, 태양도 뜨거운 군중의 환호, 그속에서도 전혀 교만하지않은 투우사의 진지한 표정.
이게 스페인의 힘이었다. 정열과 겸손이야말로 작열하는태양을 승화시킨 국민의 예지였다. 「헤밍웨이」도 여기에 미쳤고, 「피카소」의 신화도 그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더위야말로 그 민족의 저력이요, 국력인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린 좀 야단스럽고 호들갑스런 것같다. 스페인외 여름에 비한다면 우리야말로 지상낙원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사방에서 덥다고들 오도방정을 떤다. 이제 꼭 불법더위가 온다고 며칠째 협박을 하고 있다. 오면 오는거지 뭐그리 신나는 일이라고 야단들인지 말이다. 폭염이니 폭서니 거기다 살인적인 더위라고 끔찍스런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하긴 먼나라에선 그게 사실인 모양이다. 나도 최근에 1백년만의 더위가 휩쓸고 있다는 유럽을 한바퀴 돌고왔지만 좀덥더란 인상밖에 없다. 보도에서처럼 그리 요란스럽진 않다.
요즈음 우리 주외엔, 멀리서 가까이서 덥다는 소리때문에 짜증스럽다. 피서를 간다고 동네가 시끄럽다. 이 좁은 땅에 어딜가야 시원할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가면 좀 조용히나 갔으면 좋겠다. 여름마다 명사들의 피서법이 소개되고, 전력소비가 1년중 피크라느니, 하한기니…. 도대체가 신경질적이다. 괜히 옆사람까지 더워진다. 지금이야말로 「냉정」이란 말을 한번 더 생각할 때다.
아무렴 여름이 덥지 설마 시원하길 기다리진 않았겠지.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고….』 노승의 독백이 아니더라도 이건 우주의 순환법칙이다. 여름인 이상 더워야 하는건 하늘의 이치다. 햇볕이 뜨거워야 들의벼가 잘 익는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있을 게다. 여름더위는 풍성한 가을에의 약속이다. 그뿐아니다. 운동을 않는 도시인에겐 천혜의 선물이 곧 여름이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더위 앞에선 땀이 흐를테니 말이다.
씻지 말고 흐르게 두라. 방울방을 맺혀 흐르는 땀줄기를 보느라면 인생을 열심히 산 긍지를 느낄수 있을 게다. 동물적인 야성 그리고 뜨거운정열을 느낄수 있는것도 역시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에서 비롯됨을 터득할수 있을 게다. 어떤 형태로든 땀을 흘린다는건 인간의 진한 동물적 본능이다. 사냥을 위해 달렸던지, 운동이나 놀이, 더운물 목욕, 아니 몸살을 앓을 때에도 땀을 한번 흥건히 흘리고나면한결 상쾌한 기분이 된다.
여름은 우리를 진실되게하는 계절이다. 강변의 하동처럼 모두들 발가송이가 되기 때문이다. 위압감을 주는 제복도, 거드름을 피우는 코트도 사라진다. 밍크코트도 여우 목도리도 사리지니, 있다고 뽐낼수 없고, 없다고 설워할 까닭도 없다.
있는자 교만할수 없고 없는자 비굴할것 없는 계절이 여름이다. 성장한 여인이 짙은 화장도 없어지고 모두들 생긴대로의 자기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계절이 여름이다. 순수한 자기다. 허식과 위선에 찬 가면일랑 생각도 할수 없다.
신분도 계급도 없는 목욕탕에서처럼 우릴 불쾌하게 하는수많은 군상들이 사라지는 여름이다. 욕심없는 계절. 그래서 여름은 더워야한다. 더워도 초여름의 미지근한 더위가 우릴 불쾌하게 만든다. 열도 37도의 미열이 더 괴롭다. 아예 고열이면 아픈줄도 모른다. 땀 한번빼고나면 오히려 상쾌하다. 숨막히는 삼복고개에서 짜증날 여유도 없다. 오히려 오기기 생기는게 사람의 심리다. 어느 한순간 시원하리란 기대는 말자. 그게 우릴 더욱 짜증스럽게 만든다.
사람마다 여름을 사는 슬기, 그리고 보는 자세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잊어서 안될 일은 여름을 승화시킬수 있는 마음의 여유다. 해마다 오는 여름을 피하기만 한대서야 당신의 긴 인생여정엔 큰 허점이 생길 것이다.
한여름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무슨 염치로 가을을 맞을 건가. 여름은 덥고 또 더워야한다. 여름의 정열은 당신의 인생을 한결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고려병원 신경정신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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