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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0)제79화 육사졸업생들(233)베트콩의 첫 공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65년4월1일 비둘기부대는 월남땅에 첫 「건설의 삽」을 꽂았다.
디안 군청소재지에서 비둘기부대병 병영까지 2.5㎞에 이르는 자갈길을 확장, 포장하는 공사를 벌이게 된 것이다.
기공식에는 김성은국방장관·김종오합참의장관 「웨스트모얼랜드」주월미군사령관·월남군3군단장「카오·반·비엔」 중장등이 참석했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총대신 삽과 불도저로 우방 월남을 돕는 역사적인 날이있다.
35∼36도의 폭염이 장병들을 괴롭혔지만 비둘기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었다.
월남까지 자원해서 온 「큰 뜻」이 씨를 뿌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다.
베트콩은 4월2일 밤11시를 기해 비둘기부대들 기습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군 수뇌들이 부대안에 머무르고 있는 줄 알았겠지만 다행히 김장관 일행은 기공식이 끝난 직후 월남을 떠나 태국에 가 있었다.
적의 기습은 비둘기부대 참모진들이 야간회의들 하는 동안 박격포 포격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적의 첫 박격포탄은 수송대와 통신대가 사용하던 임시 텐트 옆에 떨어졌다.
조문환장군는 이미 30분전 부대전방에 잠복중인 전초병으로부터 베트콩 분대병력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사격명령를 내리지 않고 있던 터였다.
비전투부대인비둘기부대는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한·월양국간에 맺어진 실무협정을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베트공의 포격을 받는 직후 조단장은 이광노경비대대강(종합13기·중장예편) 을 전화로 불렀으나 이미 통신이 두절된 상태였다.
조단장은 전속부관정동호대위 (육사13기· 현역소장)를 본부에서 약5백m 떨어진 경비대대로 보내 상황을 살피고 오도록 지시했다.
정대위는 탄우속을 뚫고 경비대대에 도착, 전황을 파악하고 돌아왔다.
적은 비둘기부대에서 서북방으로 1km 떨어진 지점에서 포격을 개시했으며 약1개중대 규모의 병력이 아군 전초병들과 현재 교전중이라는 보고였다.
조장군은 즉각 아군의81mm 박격포사격을 명령한뒤 월남군 3군단에 포지원사격을 요청했다.
약30분간 디안의 밤하늘은 뇌성과번개치는 여름밤처럼 소란했다.
부대안에 50여발의 박격포탄이 떨어졌으나 아군은 장병11명이 부상했을뿐 다행히 전사자는 없었다.
그러나 베트콩은 10여발의 총탄을 맞고 숨진 시체1구를 그대로 남겨둔채 도망쳤다.
베트콩의 첫 기습을 용감하게 물리친 것은 비둘기부대 전초에서 잠복 근무에 임했던 병사들의 수훈이었다.
이날 밤 3중대장 권상집대위 (갑종간부출신·대위예편) 는 박재운하사(분대장) 가 이끄는 1개분대 병력을 부대 전방 1km지점에 매복시겼고 1중대장 신우식대위(육사14기·현역 소장) 는 김정남하사등 분대원 9명을 부대전방 5백m 지점에 매복시켜 3중대 뒤를 지키고 있었다.
베트콩은 아군 매복조에 걸려들어 결국 부대침투가 좌절된 것이다.
베트콩의 기습공격이 있은 후 비둘기부대는 박격포 포판을 아예 시멘트로 고정시키고 부대 전체들 지하통로로 연결시켰다고 한다.
이동용인 박격포를 고정시킨 것은 조장군의 아이디어였는데, 포사격의 오차를 줄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부대를 사수해야 한다는 의지를 장병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2일 밤 비둘기부대 습격에 실패한 베트콩은 3일 밤과 4일 새벽 두차례에 걸쳐 경비대대 잠복초소와 공병대대 정면에 나타나 한동안 피리를 불고 북을 치는등 신경전을 벌이고 사라졌다.
이들은 잠복초소와 본대 사이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달아났다고한다.
당시 본국에서는 김성은장관이 월남으로 떠나기 직전 군수뇌급 인사들 단행했는데 김용배2군사령관과 1군사렁관인 나는 대장으로 승진, 김대장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나는 합참의장에 내정됐었다.
따라서 김종오대장은 귀국후 4월10일부로 예편되면서 나와 합참의장직을 인수·인계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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