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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리프트' 유행 … 새 옷인 듯 새 옷 아닌 새 옷 스타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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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패션 매장에서 만날 신제품은 기존 히트 상품을 약간 변형한 ‘페이스 리프트 모델’이 대세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패션은 창조가 숙명이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대중의 취향,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새 브랜드와 신상품 틈에서 자신만의 생명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패션 디자이너 샤넬은 이를 두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려면 언제나 달라야 한다(In order to be irreplaceable one must always be different)”고도 했다. 한데 요즘 패션은 별로 다르지 않다. 예전에 내놨던 것에 약간의 변형을 더해 새 상품으로 포장해 출시하는데 더 열심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강승민 기자

‘마리아꾸르끼 핀율 체인백’, ‘지방시’ 선글라스, ‘스코노’ 운동화, ‘오즈세컨’ 트렌치코트(위부터). 모두 올 봄 신상품이다. [사진 각 브랜드]

‘페이스 리프트’ 패션

지난 주말부터 주요 백화점들이 대대적인 행사를 시작했다. 1월 말은 대개 ‘패션 비수기’다. 겨울옷을 제값 주고 사는 사람은 적고, 봄옷을 미리 장만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때라서다. 그런데도 대대적인 행사를 여는 건 심각한 매출 부진 탓이다. 의류 등을 포함하는 패션 분야는 백화점 장사의 큰 몫을 차지한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패션 분야는 총매출의 60%를 차지했다. 한데 롯데·신세계·현대 등 주요 백화점들이 이달 초 벌인 신년세일 매출 신장률은 0.5%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패션 분야 부진이 주된 이유다. 소비 침체가 계속되는 상황이고 그 중에서도 패션 분야에 불황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는 방증이다.

“2~3주에 한 번은 백화점에 들른다”는 직장인 정희영(39)씨는 “습관처럼 가 보지만 눈에 띄는 상품은 별로 없다. 제품이 다 그게 그것 같아 보인다”고 말했다. 정씨는 “지갑이 얇아진 탓도 있겠지만 요즘 백화점엔 시선을 잡아끄는, 색다른 제품이 없는 것 같아 구매 의욕이 안 생긴다”고 덧붙였다.

정씨가 보는 풍경은 그의 기분 때문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익명을 원한 잡화 브랜드 관계자는 “다른 브랜드가 뭘 하는지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전과 다른 모습의 새로운 상품을 내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저 전에 잘 팔리던 상품을 조금 변형해 ‘2015년 상품’이라고 포장하는 게 가장 안전한 생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창작보다는 변형에만 몰두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도 했다.

1월 말~2월 초는 패션 브랜드가 봄 신상품 기획을 끝내고 매장 제품 재진열에 들어가는 시기다. 하지만 올 봄 소비자들은 예년과 비슷한 분위기의 신상품을 만날 확률이 높다. 다수의 브랜드 관계자는 “올 봄 신상품엔 지난해나 그 이전 연도에 나와 소비자 반응이 좋았던 히트작의 변형 제품을 중심으로 판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즌마다 창의성 돋보이는 신상품이 쏟아져 나와도 시원치 않은 패션 분야에 ‘페이스 리프트’ 현상이 대세로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페이스 리프트’는 자동차 신차가 나오면 많이 등장하는 용어다. 자동차 분야에선 새로운 엔진과 차체 등을 갖춘 신차를 만드는데 개발 기간이 꽤 오래 걸린다. 그래서 연식을 달리해야 할 때 외형·사양 등만 살짝 바꿔 신차처럼 소개하는 게 ‘페이스 리프트’ 모델이다.

패션 ‘모디슈머’ 시대

불황이 패션 분야의 창작력을 옥죄는 형국이지만 한 편에선 소비자들이 이런 추세를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고 있다. 이른바 ‘모디슈머’다. ‘모디슈머(Modisumer)’란 ‘바꾸다’란 뜻의 영어 ‘모디파이(modify)’와 소비자, 즉 컨슈머(consumer)를 합친 말이다. 제품을 제조사에서 제시하는 표준 방법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짜장 라면과 얼큰한 국물 라면을 섞어 만든 ‘짜파구리’ 등 나만의 조리법으로 활용해 먹는 게 모디슈머의 대표적인 예다. 주로 식품 분야 트렌드였다.

2013년 트렌드 신조어로 등장한 뒤 지난해 식품 업체들은 ‘나만의 레시피 경연대회’ 등을 앞다퉈 열며 모디슈머 마케팅에 힘을 쏟았다. 이런 분위기가 곧 스타일 분야로 옮겨 갔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화장품 분야에만 조금씩 소개됐을 뿐이다. 튼 부위에 살짝 발라 각질을 진정시키는 연고쯤으로 여겨졌던 ‘밤(balm)’ 화장품을 여러 다른 부위에 바르는 정도가 ‘뷰티 모디슈머’로 불렸다. 갈라진 머리끝에 발라 윤기를 내거나 광대뼈 부위를 윤기 나게 하는 등의 방법은 바로 이들이 전파한 것이다. 유튜브 등 동영상 공유 사이트가 그 수단이 됐다. 오일 화장품과 수분 크림을 섞어 쓰는 것도 ‘뷰티 모디슈머’로 회자됐지만 큰 흐름을 만들어 내진 못했다.

그런데 요즘 ‘패션 모디슈머’는 다르다. 불황 탓에 부족해진 패션 분야의 창작력을 소비자 스스로 채우는 능동적 역할로 진화 중이다. 주부 박선희(35)씨는 서울 예지동 광장시장에서 의류 부자재 쇼핑을 해 ‘새 옷인 듯 새 옷 아닌 새 옷’을 직접 만들어 입는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옷을 ‘만든다’기보다 ‘수정한다’. 박씨는 어깨나 가슴에 다는 견장이나 레이스 등을 자주 구입한다. “즐겨 입었지만 조금 지루해진 셔츠나 블라우스를 조금만 손보면 색다른 분위기가 된다. 백화점에 가봐도 딱히 다를 것 없는 디자인이 많아 새 옷 쇼핑에 흥미를 잃었다”는 게 박씨 얘기다.

박씨 같은 ‘패션 모디슈머’가 늘자 패션 브랜드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액세서리 브랜드 ‘스와로브스키’의 이지연 부장은 “지난해 인기를 끈 ‘스타더스트’ 팔찌, ‘슬레이크’ 목걸이에 올해 새로운 색을 추가해 재출시했다”며 “‘익스텐더’, 즉 직접 잇는 끈을 사서 팔찌에 더해 머리띠로 사용하는 고객, 목걸이 2개를 연결해 더 길게 연출하는 소비자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출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부장은 “이런 고객들은 SNS로 자신만의 방식을 공유·전파하며 스스로 창작자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브랜드 정체성 확립의 계기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어디 있으랴. 하지만 패션 디자이너들은 끊임없이 새것을 고민한다. 역사가 100년 안팎인 해외 유명 브랜드는 영업을 오래해 온 만큼, 창조 부문 담당자들은 새 상품 기획을 할 때 더 큰 고민에 빠진다. 해서 이들이 자주 활용하는 것이 ‘아카이브(archive)’ 시스템이다. 아카이브는 ‘기록 보관소’라는 의미다. 브랜드 창립 초기의 상품이나 역사상 유명한 히트 상품을 모태로 해 변형 디자인을 선뵈거나 아예 복원 모델을 출시하는 것이다. 브랜드의 아카이브가 그 바탕이다. 프랑스 브랜드 ‘샤넬’에서 1955년 2월 처음 내놓은 가방 ‘2.55’가 대표적인 예다. 출시된 달과 연도를 따서 상품 이름을 지은 이 가방은 크기·소재·색상을 달리하며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원형 디자인은 그대로다.

샤넬은 이 가방이 50주년을 맞았던 지난 2005년 원형 가방과 똑같은 모델을 내놓기도 했다. 프랑스 브랜드 ‘지방시’의 안경·선글라스를 한국에 유통하는 ‘다리F&S’의 최형욱 마케팅 매니저는 “패션이 늘 새로워야 하는 것은 맞지만, 브랜드마다 소비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사랑 받는 스테디셀러 제품이 존재한다. 꾸준히 소비자에게 사랑 받는 상품이야말로 브랜드를 확실히 각인시키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원생 이진우(29)씨는 사선 3개로 장식한 한 운동화 브랜드의 상품을 모으는 게 취미다. “해마다 색상·무늬만 달리해 나오는 걸 집중적으로 구입해 ‘나만의 컬렉션’을 만들고 있다”는 이씨는 “50주년, 60주년 기념 상품 등을 계속 수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 같은 수집가의 존재는 브랜드에 강력한 스테디셀러가 존재할 때 비즈니스가 훨씬 더 지속 가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강력한 원형이 존재한다는 것, 불황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찾을 수 밖에 없게 하는 스테디셀러의 힘이다.

해외 브랜드에 비해 역사가 짧은 한국 브랜드들도 최근 들어 이런 흐름을 따르는 추세다. 잡화 브랜드 ‘러브캣’의 김보미 홍보마케팅팀장은 “시즌마다 브랜드 본연의 정체성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게 관건”이라며 “형태가 다른 라인의 제품에도 러브캣을 상징하는 ‘삼각 장식’을 사용해 일관된 포인트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패션 브랜드 ‘오즈세컨’의 전략마케팅팀 박형미 과장은 “지속적으로 브랜드에 관심을 갖는 소비자들이 차츰 늘면서 브랜드 정체성과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맞춰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이런 고객일수록 완전히 새로운 상품보다 익숙한 가운데 조금 다른 모양에 더 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디자인 창작 과정에 큰 변화를 꾀하기 어려워진 경영 환경이 업체로 하여금 숨을 고르며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는 전기를 마련해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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