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남의??군??면양역리에서 항일의병들의 돌무덤이 발견됐다. .
1908년 (합방 2년전) 문??의병장이 이끄는 20여명의 의병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9명이 전사한 곳이다.
그때의 상황을 목격한 90노령의 증언에 따르면 의병들은 『총을 여러개 모아 세워두었고 배적삼을 입었다』 고 한다. 이미 신식장비를 갖춘 일본군과 거의 맨주먹으로 싸우다시피한 선열들의 기개를다시 보는 듯하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07년부터 1910년(합방) 까지 4년동안에만 의병이 일본군과 접전한 횟수는 2천8백52회고 의병수는 l백40만5백59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1천3백여만명밖에 안된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저항운동이었다.
이처럼 일세를 진동한 대중 저항운동이 아직도 역사의 그늘에 묻혀 소홀히 취급되고 그들의 활약이 산견되는데 그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더구나 의병의 활동은 임진·병자의 두 수난, 동학의 봉기등과 맥을 같이 한다. 민족의 자존·자립을 행동으로 표시한 증거며 그것은 곧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의병의 사상적 배경은 농민들의 향토애와 ?림의 구국정신으로 요약되고, 곧 이것은 민족수호정신으로 연결된다. ?병하는 ?문은 대개 「위정척사」 「위국??」 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거병의 주동자는 스스로 「창의대장」임을 공언했다.
일제의 수탈이 노골화되자 의병 참가자는 저림과 농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상인·승려·훈병등 전 계층을 망라했다.
이처럼 민족이 수난과 치욕읕 당할때는 어느 곳에나 저항운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간디」 의 비폭력 저항운동,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폭력행사까지 서슴지않는 저항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북경감옥에서 숨진 시인 이육사는 『속야』 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해 휘달릴 때도/참아 이곳읕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부즈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큰 강물이 바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대는 바뀌어서, 자꾸 민족을 운위하는 것이 답답하게 여겨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 없는 장정들의 저항운동은 우리 핏속에 녹아 있으며 바로 우리의 한 부분이다. 이제라도 차근히 선열들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하고 보전할 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