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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영화천국] 촬영전 告祀는 '신경안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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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Q : 얼마 전 TV에서 영화 '실미도'촬영을 시작하기 전 고사를 지내는 걸 봤는데 고사는 필수인가. 고삿상에 돈이 놓이던데 그 돈은 어디에 쓰나.

A : 최근 들어 무궁화 네개짜리 호텔에서 제작 발표회를 거하게 여는 영화사들이 늘어났다. 이런 제작 발표회가 '선택과목'이라면 끽해봤자 20만원 안팎에서 간소하게 치르는 고사는 '필수과목'에 해당한다. 다른 건 몰라도 고사는 꼭 지내야 한다는 얘기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고사를 선호하는 이유는 잘 알다시피 심리적인 보험이 되기 때문이다.

촬영이라는 게 좀 험한 일인가. 스태프의 무사를 기원하는 행사를 치르지 않으면 어딘지 찜찜한 것이 한국 영화인인 것이다. 좀 거칠게 비유하자면 비데가 편리한 건 알지만 그래도 휴지로 뒷처리를 해야 개운한 심사라고나 할까.

고사 없이 촬영을 시작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러다 사고라도 일어나게 되면 "고사를 안 지내서 그렇다"며 민심(?)이 동요하게 마련이다. 잘 되면 고사 (치른) 덕이요, 못 되면 고사 (안 지낸) 탓이다. 고사는 영화인들이 전장으로 떠나기 전 찾는 일종의 신경안정제다.

식순(式順) 중에는 촬영장 사정에 맞게 귀신 이름을 열거하는 것이 있다. 가령 밤샘 촬영이 잦다면 "우리 현장에 잠귀신은 따라다니지 마옵시고…"라고 빈다.

야외 촬영이 많다면 "비귀신.눈귀신이 저희를 쫓아다니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기원하는 식이다. '실미도'는 실미도에 세트장을 설치할 때 하도 '비바람 귀신'이 텃세를 부려 미술팀이 따로 약식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상차림의 하이라이트는 돼지 머리다. "영화 잘 되라고 비는 자리이므로 아무 돼지나 올리는 게 아니"라고 한다. 미스 코리아 뽑는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선별 기준이 자못 엄격하다.

다음은 한 관계자가 말하는 '좋은 돼지 고르는 법'. 첫째, 웃는 표정이어야 한다(돼지 입장에서 보면 죽은 것도 뭐한데 미소까지 흘려야 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을테지만). 둘째, 귀가 쫑긋 서야 한다. 셋째, 입을 가급적 많이 벌려야 한다.

앞의 두 가지는 미학적 관점이지만 세번째 이유는 다분히 기능주의적 관점에 근거한 것이다. 입을 많이 벌려야 돈이 많이 꽂히기 때문이다. 입 쩍 벌린 돼지 머리 찾는 게 고사 담당자들은 제일 임무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궁금한 돈 얘기를 빼먹었다. 고삿상에는 참석자들의 ‘촌지’가 놓인다. 적게는 1백만원대부터 많게는 5백만원대까지 모인다.

이 돈은 어디다 쓰느냐. 고래로 음주가무를 즐겨온 우리 민족답게 그날 모인 사람들의 회식비로 쓴다. 혹 돈이 남으면 잡비로 쓴다.

지난해 개봉한 ‘재밌는 영화’는 모인 돈으로 도서상품권을 사서 스태프에게 나눠줬다고 하는데 이는 대단히 드문 경우다. 돈이 많이 모였다고 마냥 기뻐할쏘냐. 경조사비의 원리와 똑같다. 지금은 내 돈 같지만 결코 내 돈이 아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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