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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외국 바로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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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된통 당한 뒤에도 조선의 지식인들은 여전히 일본을 깔보았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푹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절 조선 통신사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마다 많은 일본 지식인이 한 수 배우고자 숙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통신사 중에는 일본인들이 고개숙여 내민 종이에 글씨를 써주면서 문진(文鎭) 대신 발꿈치로 종이를 눌러 밟고 붓을 휘갈긴 사람까지 있었다. 이런 오만불손한 태도에 울분을 토로한 일본인들의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물론 박제가(朴齊家.1750~1805) 같은 실학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중국을 섬기고 이웃 일본과 사귀기 위해 사신 가는 신하들의 행렬이 길에 이어지기는 하나, 다른 나라의 훌륭한 법을 한 가지라도 배워오는 자가 전혀 없다. 그러면서 저들을 비웃어 왜놈이니 되놈이니 떠든다"고 한탄했다('북학의'.안대회 역).

근대 중국도 다를 게 없었다. 메이지(明治)유신 후인 1885년 일본을 둘러본 중국인 유학자는 일본에 대해 "문명개화라니 얼토당토 않다. 우물안 개구리 같다"고 조소했다.

이순정(易順鼎)이라는 다른 중국인은 '토일본격문(討日本檄文)'이라는 글에서 "다른 사람(서양)의 의복을 흉내내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고, 제멋대로 유신이라고 부르니 그 이름을 더욱 더럽히고 있다"고 깎아내렸다.

제 나라가 다 쓰러져가는 주제에 진기원(陳其元) 같은 이는 "정병 만명을 선발해 나가사키(長崎)를 경략하고 왜도(倭都)로 진공하자"고 건의했다(왕효추 '근대 중국과 일본'.신승하 역). 이후의 역사는 과연 누가 '우물안 개구리'였는지 입증하고 있다.

조선통신사든 중국 유학자든 그들도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다른 나라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점에서 1백, 2백년 전 동아시아의 식자들의 짧은 안목을 무턱대고 비웃을 일만도 아니다. '외국 바로보기'는 외국에 관한 정보뿐 아니라 그 나라에 비춰 본 우리나라, 그리고 국제사회 내에서의 양국관계를 종합할 때 가능해진다.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등 방미 중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잇따른 대미 유화 발언이 화제다. 그런 발언들에서 한국의 위상과 처지를 고려한 실용주의자의 고뇌가 느껴졌다면 기자만의 생각일까.

노재현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