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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자식은 남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11호 22면

서울 강남에 사는 40대 후반의 남성이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하고 도주하다 잡혔다. 실직 후 주식 투자로 손해를 보자 모두 함께 죽으려고 가족을 먼저 죽였다. 그런데 막상 자신은 자살에 실패하고 며칠간 방황하다 잡혔다. 조사해 보니 아직 상당한 재산이 남아 있었다.

그는 왜 이런 극단적 결심을 하게 됐을까. 아마도 중산층이란 확고한 사회적 지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실패란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막다른 상황을 만났다. 연구에 따르면 부정적인 생각이 강해지는 시기보다 이를 중화시키고 사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긍정적인 대안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을 때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고 한다.

문제는 왜 혼자 죽지 않고 가족과 다 함께 죽기를 결심했는가에 있다. 국내에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죽는 사건이 특히 잦다. 언론은 ‘일가족 동반자살’이라고 보도한다. 가족 동반자살을 주도하는 이들은 자신이 죽고 나면 아이들은 더 불행해질 것이고, 나도 생존하지 못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러니 차라리 함께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일러스트 강일구

일본의 분석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는 “한국인은 가족을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는 가족 자아(family ego)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은 자식을 자신의 분신이자 확장으로 여긴다. 내가 아픈 것보다 자식이 아픈 것을 더 아파한다. 그러니 자기가 죽으면 함께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만큼 사회는 이런 사건들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 왔다. 지금까진 대부분의 가족 동반자살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정에서 일어난 까닭이기도 했다.

이번엔 그런 가정이 아니라서 많은 사람이 ‘어 이상하다’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이 사건은 정확히 말해 ‘아내와 자녀 살해에 이은 자살기도’였다.

이제는 동반자살이란 단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 그 안엔 ‘가족은 단일 운명 공동체’이고 ‘부모의 자아가 확장된 형태가 자식이므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아이를 때리거나 학대하는 부모를 신고하면 “내 아이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상관하느냐”고 반발하는 곳이 우리나라다. 우리 모두가 저변에 깔려 있는 가족 자아 심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형법에서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존속살해는 최소 7년 이상 징역으로 가중 처벌한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비속살해는 일반살인과 같고 실제론 정상참작으로 많이 감형된다고 한다. 법부터 부모가 우위에 있다는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하극상은 엄히 다루지만 부모의 행위엔 관대한 양상이다. 이것부터 바뀌어야 한다. 최소한 아이에 대해선 반대로 다뤄야 하지 않을까.

자녀에겐 부모에겐 없는 다른 기회와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부모가 마음대로 결정하고 그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리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생각을 ‘가족은 한 덩어리다’에서 ‘자식도 엄밀히 말해 남이다’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엄마 배에서 나온 순간 자녀는 자기 길을 걸어간다. 자식은 내 자아의 일부가 아니라 나를 많이 닮았지만 독립적인 개별 존재임을 인정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번 자식 살해 사건뿐 아니라 넓게는 사교육 과열, 직업 세습과 같은 비슷한 맥락의 병폐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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