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력과 스포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모든 사람이 쌍손을 들고 찬성하고 있을때, 한두명이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야 민주주의도 제 구실을 한다. 그래서 몇마디 반대의견도 펴본다.
세계 주니어 축구선수단이 돌아온 날 김포공항은 환영잔치로 벌컥 둬집혔고 「개선」 퍼레이드를 중계한 아나운서들은 잔뜩 흥분에 들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사전을 들춰봤다. 「개선」은 역시 싸움에 이기고 돌아올 때만 쓰는 말이었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예상이상으로 잘 싸워준 것은 사실이다.
세계축구의 정상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장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우승이 아닌 4위를 「개선」이라 할 수 있을까?

<올림픽 개최국 긍지>
그리고 만약에 이번의 4위가 주니어가 아닌 진짜 월드컵축구대회에서였다면 그때에는 우리 모두가 얼마나 흥분의 광란속에 빠져야 옳겠는가?
어느 칼럼니스트는 『보다가 처음보는 일』이라며 혀를 찼다.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것, 우리를 들뜨게 만드는 것이 이것 밖에는 없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 한가닥 서글픔 마저 느낀다.
멕시코 올림픽때에선지의 기록영화에서 가장 감동을 준 것은 남자1백m에서 우승한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선수가, 그리고 또 2백m에서 우승한 자메이카의 선수가 초라한 자기네 국기를 바라보며 부르쥔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는 장면들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승대에 오른 미국이나 소련, 또는 서독의 선수들의 표정은 마냥 담담하기만 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나라이기에 어깨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선수에 있어 우승대 위에서 느낀 감격이 얼마나 컸겠는지를 우리는 잘 안다. 우리 역시 한때는 보잘것 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엊그제의 일.

<국력, 세계곳곳에>
이젠 우리가 스포츠로나마, 또는 스포츠로 밖에는 국위를 떨칠길이 없다고 생각할 단계는 훨씬 지났다. 우리가 올림픽의 개최국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떳떳할 수 있는 것이다.
금메달을 몇개 따든, 한개도 못따든 조금도 부끄러울게 없다.
언젠가 미국의 TV에서 흑인들의 능력에 대한 좌담회가 있었다. 이때 한 백인이 스포츠에 있어서는 흑인의 능력이 백인을 능가한다고 말하고, 그 예로 야구·축구·농구·권투에서의 유명한 흑인선수들 이름을 들췄다. 물론 그는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자 한 흑인 참석자가 정색을 하고 반론을 폈다.
그에 의하면 흑인이 백인 보다 운동능력이 있는게 아니라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흑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운동밖에 없기에 모두 죽어라고 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백인들은 운동선수가 되지 않아도 출세할 길이 많지 않느냐, 그러니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가난한 흑인들처럼 머리만을 싸매고 금메달을 따야할 형편은 아닌 것이다.
물론 기왕에 싸운다면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게 좋다. 그러나 너무나도 승패에 집착한 나머지 우리가 까마득히 저버리고 있는 사실들이 너무나도 많다. 우리는 해마다 수없이 .많은 각종 국제시합을 위해 수십명씩의 선수단을 파견할 수 있을만큼 자랐다는 사실을 잊고있다.
경기가 어디서 개최되어도 항상 수십 수백명의 교포들, 상사주재원가족들이 응원할 수 있을 만큼 국력이 세계의 구석구석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까마득히 잊고있다.
우리는 마치 국력이 스포츠를 강하게 만드는게 아니라 스포츠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고 엄청난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만 같다.
「코마네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몇개씩이나 땄다고 해서 루마니아가 더 강해지지도 않았으며 루마니아의 국제적 위치가 높아진 것도 아니다.
축구선수 「펠레」가 열 사람씩이나 나온다고 브라질사람들이 더 잘 살게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줄 몰라서 우리는 금메달의 영광만을 쫓으려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을 올림픽에 걸고 있는 것만 같다. 도시재개발도, 환경미화도, 일상적인 에티케트의 순화도 모두 88올림픽을 위해서라고 한다. 올림픽이 아니었더라도 국민을 위해서 해야할 일들인데 말이다. 본말이 완전히 전도되어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본말이 전도된 생각>
스포츠 장려의 참뜻은 국민의 체력향상에 있다. 국민의 체력은 국력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 꼭 올림픽에 이기기 위하여 스포츠를 장려하는 것처럼 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선수양성을 위한 체육만이 있을 뿐이다.
스포츠를 장려하는데 으레 내거는 말이 있다.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신체에 깃든다』 는 (요새는 이런 말도 듣기 어렵게 됐다). 그리고 이 말은 옛 로마시대의 시인 「유베날리스」가 한 것이라 한다. 천만의 말이다. 「유베날리스」가 한 말은『건전한 정신과 건전한 신체를』이었다.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신체단련과 오락을 위한 스포츠에만 열중하여 건전한 정신을 키우는 일은 등한시했다.
그래서 기왕이면 건전한 신체와 아울러 건전한 정신을 키우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으로 그는 『건전한 정신과 건전한 육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게 어느 사이엔가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서』로 둔갑된 것이다. 현대인이란 이처럼 교활하기만하다.
그런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는 특히 요새 마냥 스포츠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TV도 스포츠일색이다.

<빼앗긴 어린이 프로>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TV 각사의 스포츠 프로그램은 전체의 19%가까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 절반이상이 프라임타임에 방송되고 있다. 이 때문에 희생되고 있는 것이 전체방송량의 13·5%밖에 되지 않는 어린이 및 청소년프로, 그나마 부족한 시간중의 18·5%가 스포츠중계에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보는 것, 듣는 것이 모두 스포츠이며 공을 남달리 잘 차고, 잘 때린다고 억대의 돈을 받아 효도를 할 수 있고, 영웅대접도 받게되는 사회가 되었나보다. 애써 공부를 해서 월급 몇푼 받겠다고 굽실거리며 직장에 다녀야하는 모든 봉급장이들의 축 늘어진 어깨에서 자라나는 세대들은 무엇을 느낄 것인가.
이리하여 영광에 불타는 어린이들은 모두 운동선수가 아니면 가수가 되겠다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이들을 키우기 위해 일해야 하는 꼴이 된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겠지만 스포츠에 의해 4천만이 열광하는 것을 탓하는 사람이 지금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아무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