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말재주. 일본의 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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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일간에 걸려있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이라는 현안문제가 일본측에 의한 부분적인 수정통고로 일단락 되려는, 바람직하지 못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작년 여름내내 두나라 관계를 최고도로 긴장시킨 일본의 역사왜곡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우리는 39개 항목의 시정을 요구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하고도 특히 악의적이라고 지적된 12개 항목에 대해서 일본의 반응을 지켜보는 우리 태도는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정부에 통고된 일본의 시정내용은 7개항목 뿐이다. 39개 항목의 시정요구에 7개항만을 고쳐 썼다니까 일본은 양적으로도 우리의 기대를 크게 배반하고 성의있는 시정을 다짐한 약속을 위반한게 를림없다.
그러나 우리의 불만은 양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고쳐 쓴 7개항의 내용을, 신문보도에 나타난대로 잠깐만 들여다 보아도 『이렇게 고쳤읍니다』하고 일본이 통고하여 온 것은 철두철미 일본적인 말재간과 잔꾀의 산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런 것을, 내용의 질적 양적 검토에 앞서 문교당국이 「상당부분의 시정」이라고 평가했다니 그런 보도가 사실이면 우리정부가 이일을 성급히 일단락 지으려는게 아닌가하는 의혹이 생긴다.
시정통고된 7개항을 신구표현의 차이를 표로 단순화하여 놓고 보면 일본이 제법 성의를 보인 것처럼 오해하기 싶다. 예컨대 일제의 조선 「진출」을 「침략」으로 고쳤다는 부분을 단순히 「진출→침략」으로 도식화하여 놓으면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시아침략과 일본의 조선진출」이 「제국주의국가들의 중국·조선침략」으로 바로 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로 표현된 구절에서는 일본이름이 쑥 빠져있고, 암시적으로는 일본의 조선침략은 19세기말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지배의 큰 바람을 탄 역사적인 필연처럼 개악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3·l운동도 「폭동」을 「독립운동」으로 고쳤다고 하지만 그 운동이 시종일관 평화적인것은 아니었다는 단서를 붙여 그 운동을 탄압한 일제의 악행을 정당화하려는 자세를 고집하고 있다. 그리고 3· 1운동에 1백만명이 참가했다고 밝히면서도 일제군?의 잔악한 탄압에 의한 살상자의 엄청난 규모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일합방 후 일제가 우리의 토지를 강제수용한 부분도 「토지수용」을 일본말로 「도리아게루」 (取?上??)라고 고쳐, 보기에 따라서는 뺏을 만하기에 뺏았다는 뉘앙스를 남기고 있다.
이런 식의 말재간이 통고된 7개항마다 들어있다.
지난해 역사왜곡 파동을 겪은뒤 일본에 「나까소네」내각이 들어서고 한일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을 계기로 두나라관계는 급속히 개선되었다. 「길고 무더웠던」 작년 여름에는 상상도 못하던 사태의 진전이다. 경협문제가 매듭지어진 것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역사의 기술은 오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 자손만대를 위한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인 동물」이라고 할 만큼 역사는 중요하고, 따라서 역사는 올바로 기록되어야 한다.
가까운 이웃이오, 우방이오, 그리고 미국과 함께 동북아시아의 군사적인 안정에 공동으로 기여하고 있는 한일 두나라가 불행했던 과거를 극복하고 전향적인 자세로 협력하고. 교류하는 것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지난날의 역사를 올바로 기록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일본의 지배층일반, 그리고 특히 문부성의 관리들이 아직도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아시아를 폭력으로 유린하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못 버리고, 그러기 때문에 날조된 역사를 고쳐쓴다면서 얄팍한 말재간과 잔꾀를 부린 것은 장기적인 한일관계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다.
민간차원에서 문제삼기 전에는 역사왜곡을 좌시했거나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우리 정부의 관계부처는 구멍투성이의 7개항 시정을 「상당부분의 시정」으로 .받아들여서도 안되고 그럴 자격도 없다.
일시적으로 한일관계가 제자리걸음을 걷거나 다소 후퇴하더라도 일본이 날조한 한국관계의 역사는 양적으로나 내용상으로 정말 성의있는 시정이 있을 때까지 문제를 삼고 요구를 거듭할 것을 우리당상에 촉구한다.
일본으로서도 긴 역사적인 안목에서 볼때 그들의 자라나는 세대를 「역사적인 색맹」으로 만드는 것은 일본에 불행을 자초하고 문명국가·문화국민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행위다. 일본이 「마음」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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