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선지 루트 1만km] 6. 만리장성 서쪽 끝 - 장예 ~ 자위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만리장성의 서쪽 끝 자위관. 지난날 서역으로 가려는 상인이나 군대는 모두 이곳을 통해야 했다. 자위관의 성루에 오르면 사막에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장성을 바라볼 수 있다. 조용철 기자

자위관에서 안시로 가는 길. 세차게 몰아치는 고비탄(사막)의 바람을 이용하는 풍력발전소가 사막의 한가운데 서있다.

아침 나절부터 줄곧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뜨거운 햇볕이 눈이 부시게 내리 쬐었다. 간혹 마을을 만난다 하더라도 미루나무들만이 쭉 고개를 내밀 뿐이다. 가도 가도 사막만 바라보이는 살풍경.그나마 저 멀리 보이는 기련산맥의 희디 흰 설산들, 그리고 끊어지고 허물어진 장성과 목초지 사이로 느릿느릿 나타나는 양떼와 고성들의 모습이 시야를 달래주었다.

장예를 떠나 자위관(嘉□關)을 향해 약 10㎞ 정도 달리면 한나라 초기 흉노가 세웠던 흑수국(黑水國) 유적지와 만난다. 흑수하라고 부르는 강옆에 자리 잡은 성이었다. 이곳 역시 당시엔 비단길의 요충지였다. 기련산맥에서 넘어오는 첫 번째 길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흉노들이 비단길을 오가는 상인들로부터 통행료를 갈취했으리라는 짐작도 어렵지 않게 하게 하는 지형이었다.

도로 사정이 유독 안좋은 이유는 확장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공 땐 장쑤성(江蘇省) 롄윈강(連雲港)에서 신장성(新疆省)의 성도인 우루무치까지 총 연장 3800㎞의 4차선 고속도로가 생긴다고 한다.

공사중인 도로를 우회해 옛길로 접어든 김에 한 두 농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한 집의 식구는 5명이었고, 다른 한 집은 농사일을 돕기 위해 와 있는 딸 식구를 포함해 7명은 돼 보였다. 모두 우리의 옛 시골처럼 일행을 반겨주었다. 이들은 대개 옥수수 농사를 짓는데 1년 수확량이 1000㎏을 넘지 못한다고 한다. 간신히 가계를 꾸려 나갈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서북 대개발 사업이 곳곳에서 진행되곤 있지만 아직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옹색한 가계를 꾸려나가기에 급급한 가난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주취안(酒泉)을 거쳐 강철의 주산지이기도 한 자위관을 향해 달렸다. 자위관은 하서회랑 가운데 기련산맥과 마종산맥의 간격이 불과 25㎞ 정도로 좁아진 협곡지대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바람이 거센 곳이라 4, 5월이면 돌이 날아다닐 정도로 휘몰아쳐 차량통행이 통제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위관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으로 유명하다. 동쪽 산해관에서 시작된 장성이 서쪽으로 만리를 달려 이곳 자위관에서 비로소 그 수명을 다하고 사막의 모래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든다. 명나라 때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란 현판을 세워 서북의 끝임을 표시했다. 지난날 서역으로 가려는 상인이나 군대는 모두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자위관 주변의 장성 축조에 사용한 진흙은 모두 란저우에서 실어온 것이라 한다. 부근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모래 뿐 흙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자위관의 성루에 올라 끝간 데 없이 펼쳐져 모래 바람만 희뿌옇게 깔린 황량한 사막을 바라본다. 모래바람 사이로 간혹 꼬리가 길고 긴 화물열차가 지네처럼 구물구물 기어가고 있다. 저 멀리 모래 바람을 뚫고 말을 탄 흉노들이 괴성을 질러대며 달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고선지보다 40여년 늦게 태어난 당나라 시인 노륜이 쓴 '장복야의 새하곡(塞下曲)에 화답함'이란 시가 있다.

달이 없는 밤, 기러기는 높이 나는데

선우(單于) 멀리 도망간다

재빠른 기병(輕騎) 데리고 추격하려 하니

펑펑 쏟아지는 눈이 활과 칼에 가득하다

칠흑 같은 밤 흉노 병사들이 그들의 수령 선우를 따라 퇴각할 때, 당의 장군이 경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려하자 눈이 쏟아지는 상황을 묘사한 시다. 시에서 '경기'(輕騎)는 고선지가 적군을 격파할 때 중무장 기병이 아니라 경무장한 기병을 사용한 전략과 같다. 용맹한 고선지가 북방 기마 민족을 추격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노륜은 이 시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선지는 20여세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시(安西)로 왔고, 이곳에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제수됐다. 아버지 덕을 보기도 했지만 고선지 자신의 지휘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유격장군부는 독립된 지역사령관의 지위였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맡길 자리는 아니었다.

우리 일행은 자위관에서 255㎞ 떨어진 안시로 발길을 재촉했다. 안서도호부의 안서가 아니라 그보다 한참 동쪽에 있는 지명 안시를 말하는데, 이곳의 당나라 때 지명은 과주(瓜州)였다. 자위관에서 병목현상을 보이던 기련산맥과 마종산맥 사이의 폭이 다시 넓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도 사막 지역을 유용한 땅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눈에 띄었다. 모래 바람이 자주 일어나는 철길에는 이중으로 설치한 나무 방책들이 끝간 데 없이 이어져 있다. 상태가 좋은 철길 주변은 지하수를 끌어다 물길을 만들고 양옆으로 나무를 심어 철길이 흙에 묻히지 않도록 했다. 이런 사막의 바람을 놓칠세라 설치한 풍력발전소도 눈에 들어왔다. 그 수가 100여개를 헤아렸다.

자위관을 출발해 1시간쯤 지났을까 뙤약볕 아래 가만히 누워있는 교만성(橋灣城)에 도착했다. 들러보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이 성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탐관오리를 잔인하게 처단한 사실로 널리 알려졌다. 강우량이 적은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인지 지금도 상당부분 멀쩡하게 보전돼 있었다. 당시 강희제는 정금산(程金山)이란 관리에게 많은 돈을 주어 이곳에 행궁을 짓도록 명했다. 그러나 정금산은 이곳이 황궁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황제의 시선이 미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는 공사비의 대부분을 착복하고는 아주 초라한 행궁을 지었다. 암행어사를 보내 이 사실을 확인한 황제는 정금산과 두 아들을 참수한 후 정금산의 두개골은 그릇을 만들고, 그의 등을 벗겨 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 두개골을 합쳐 작은 북을 만들어 교만성에서 40여㎞ 떨어진 영녕사(永寧寺)라는 절에 걸어 두었다. 사찰 앞을 오가는 백성들로 하여금 탐관오리를 경계하도록 했던 것이다. 지금 교만성에는 정금산 부자를 처형한 단두대가 남아 있고, 영녕사에 걸려 있었던 두개골 그릇과 북이 교만성의 전시실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