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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14장 CD에 삶을 담아 행복의 나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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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한대수는 "후배 싱어송라이터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스 세트에는 1970년대 말 미국 뉴욕에서 결성한 징기스칸 밴드 시절의 곡과 97년 후쿠오카에서 발표한 ‘스키야키’ 등 미공개 트랙, 뉴욕과 서울에서 찍은 뮤직비디오와 메이킹 필름도 담겨 있다.

서울 신촌의 한 오피스텔. 열 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한대수(57)가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고독한 방에, 고독한 기타가 누워 있네. 자, 고독한 차를 듭시다." 5일 한대수의 37년 음악 인생을 정리하는 14장짜리 CD 세트 'The Box'가 발매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차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포크의 대부'라는 묵직한 수식어를 단 그의 보금자리는 소박했다.

"내 꼬마 방 어때요? 전 세계가 내 공원인데 집이 넓을 필요가 있나. 씻고 자고, 기타 좀 칠 수 있으면 그만이지."

그는 내일 일은 계획해도, 내년 일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란다. 그저 현재, 오늘에 충실하다. 그런 그에게 과거를 모두 담은 박스 세트는 특별한 일이다.

"매년 앨범을 낼 때는 몰랐는데, 37년이나 음악을 했다는 게 이제 실감나요. 모두 136곡이나 된대요."

박스 세트를 내는 데 4년이 걸렸다. 판권 협상 때문이었다. 작사.작곡에 노래까지 직접 한 '싱어송라이터'인데도 초기 앨범의 판권은 음반사가 갖고 있다. 음반을 낼 기회를 잡기조차 어려웠던 시절, 말도 안 되는 계약서에 사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평생 해 놓은 게 없어요. 돈을 번 것도 아니고, 결혼 생활을 평탄하게 한 것도 아니고…. 다행히 음악은 남았어요."

왕년의 히트곡만으로 노년을 영위하는 가수도 많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창작하고 노래했다. "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작곡을 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면 상처와 고통을 나누는 것 같았죠. 돈이나 명예 따위의 목적 의식은 없었어요."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났던 그의 아버지는 십여 년간 종적을 감췄다. 그래서 아비 없이 자라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정체성의 혼란도 느꼈다. 그래서 기타를 잡았다.

자신을 '상처투성이'라 했지만 내내 명랑했다. 고통을 알아야 기쁨도 알기 때문이란다. 급히 약속을 잡고 찾아온 기자에게 "고독은 나누면 반이 된다"며 손수 만든 스테이크, 으깬 감자에다 와인을 내놓는 여유도 있었다. 막상 자신은 "이 달에 공연이 많다"며 와인을 마시지 않았다.

데뷔 35주년, 40주년같이 똑 떨어지는 해는 아니다. 그러나 올 가을은 한대수의 계절이 될 것 같다. 7~9일 경기도 광명에서 열린 '광명음악밸리축제' 홍보대사를 맡았다. 한국 뮤지션의 역사를 재조명한다는 취지로 기획된 이 축제에서 한대수는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음악 프로그램 겸 콘서트 'EBS 스페이스 공감(www.ebsspace.com)'에서 준비한 '우리가 그들을 거장이라고 부르는 이유'의 첫 주자도 한대수다. 10~12일 공연하고 다음달 12일 전파를 탄다. 이달 24일엔 일본에서 열리는 '팝아시아 2005' 무대에 선다. 같은 날 그의 첫 에세이집 '올드보이 한대수'(생각의 나무)도 발간된다.

"박찬욱 감독이 제 음악을 좋아하거든요." 박찬욱 감독이 그의 이름을 따 주인공을 '오대수'라 불렀고, 출판사는 박 감독의 영화 제목을 따 에세이집 작명을 했다는 것이다. 에세이집에는 '인간을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위험한 수단'인 신용카드에 대한 생각, 이미 '10대 때 모든 마약을 졸업한' 입장에서 보는 마약, 그리고 여행기와 사진 200여 컷이 담긴다.

"이상하게 여러 일이 한꺼번에 터지네요. 그렇다고 앞으로 신곡을 안 만든다는 건 아닙니다."

그는 "고통과 상처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같다"고 했다. 그가 창작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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