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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깨나 이박사 생각뿐"|83회 생일맞는 「프란체스카」여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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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느해 생일엔가 파파는 부채에 난을 쳐서 선물로 주셨지요. 또 다른때는 경무대 풀에서 장미를 꺾어 말없이 건네주기도 했어요.』83회 생일을 맞은「프란체스카」여사의 회고담이다.
6월15일 생일아침 가족들과 함께 미역국을 들였다는 「프란체스카」여사는 은빛 쪽머리에 초록색 잎사귀 무늬가 든 연옥색 노방주 치마저고리로 단장한 기품있는 한국 노부인의 모습 그대로다. 『요즈음 내 생활은 아주 행복하고 만족 스럽습니다.』
요즈음같이 가물때는 목욕물도 아껴쓰고 물을 많이쓰는 청소는 되도록 삼간다.
또 평소의 밥반찬은 멸치볶음등 너멋가지이며 식사중 밥알이 떨어지면 손으로 주워먹는 알뜰함을 생활의 신조로 삼고있다고 주변사람들은 말한다.
「프란체스카」여사는 경무대시절 처음 맞는 고이박사의 생신날 주위사람들에게 물어 손수 미역국을 끓이고 나물과 잡채를 마련해 이박사를 무척이나 즐겁게 해드리기도했다.
내년이면 금혼식을 맞는 여사는 이박사가 생전에 잘해주었느냐는 질문에 『그야 물론』이라면서 『그는 참으로 성실하고도 사려깊은 사람이었다』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또 이박사의 어떤 점을 매력이라고 생각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누군가를 사랑할때 그사람의 매력같은것은 아무 문제가 안된다』며 『나는 그를 아무 조건없이 사랑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유복한 가정출신의 처녀로서 먼나라의 가난하고 기약 없는 한 망명독립투사와 일생을 같이 하겠다고 결심한 사실로 충분히 입증된다.
34세의 나이로 59세의 이승만박사와 결혼한뒤 여사의 생활은 이박사의 눈을 통해 모든것을 보는 전혀 다른것으로 변모했다.
독립투사들의 뼈저린 궁핍과 고난을 체험한 여사는 경무대시절에도 양말을 손수 기워신고 사치한 음식을 멀리했으며 친정인 오스트리아에도 여비가 아까와 가지 않았다.
작년에 단하나 혈육인 언니가 별세했을때도 마침 유럽출장중이던 양자인수씨를 대신 조문케했다. 이박사사후 한번도 오스트리아에 간일이 없다고.
여사는 자신의 장례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간소하게 해달라고 평소에도 틈틈이 이른다고 며느리 조혜자씨는 말한다.
조씨는 독립유공자들의 유족이 대부분 가난을 면치못하고 사는데도 일부부유층에서 지나치게 사치한 의식주와 관혼상제로 재력을 과시하는 경향을 「프란체스카」여사가 내실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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