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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8)제79화 육사졸업생들(191)|졸업 앞둔 생도 1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육사생들은 사관학교에 입교하면 『화랑대에서 국군묘지까지』라는 말에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해 이 말이 가슴 깊숙이 와 닿을 무렵 육군소위로 임관, 학교를 떠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버리는 「군인의 길」을 배운다고나 할까.
생도 1기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50년 7월15일로 예정된 졸업식을 앞두고 6월 한달동안 거의 행군과 부대전투훈련(중대 및 대대)으로 땀을 흘렸다.
입교 6개월 후부터는 유급을 절대로 인정치 않는다는 엄격한 새 교칙이 마련돼 학업성적과 내무생활에 뒤떨어졌던 40여명이 퇴교당했고 1명이 병사했다.
나머지 2백60여명은 고된 훈련과 막바지 수업을 받으며 소위임관만 기다리고 있었다.
더우기 6월1일은 바로 밑 후배인 생도 2기생 3백34명이 입교해 선배로서의 품위와 새로운 전통을 물려주기 위해 제각기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6월12일 대강당에서 육사 개교이래 처음으로 화랑회 주최로 신입생환영회를 열고 선후배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6월24일은 토요일이었다. 학교당국은 10기생들에게 졸업 전 마지막 외박(l박2일)을 주었다.
말만 외박이었고 졸업 전에 실시되는 3박4일간의 행군준비를 위한 「행군외박」이었다. 행군때 먹을 마른반찬과 비누·치약·양말 등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기에 바빠 잠시도 쉬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이 「행군외박」이 10기생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줄이야 아무도 몰랐다.
당시 군은 5월1일 노동절과 5·30 총선거에 대비한 비상경계령을 선포했다가 해제한데 이어 6월11일에는 심상치않은 북괴군의 움직임에 대처하여 다시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었다. 10여일이 지나도 별다른 징후가 없어 6월23일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전장병들에게 주말 외출을 허가했다.
이무렵 나는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에서 6월10일자로 육본작전국장(대령)으로 자리를 옮겼었다.
24일 토요일 밤은 마침 육군참모학교 구내에 꾸민 장교구락부가 오픈되는 날이어서 한·미군 고위장성 대부분이 모여 칵테일파티를 열었다. 밤 11시께 파티가 끝나 서울 아현동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부끄럽고 한심했던 일이지만 그때 우리집에는 군용전화는 물론 일반전화도 가설돼 있지 않았다.
용산 참모학교 근처에 살다가 아현동으로 막 이사를 왔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6·25 당시 육군본부 작전국장 집에 전화가 없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6·25가 터진 것을 알게 된 것은 6월25일 상오 10시께였다. 일요일인데 집 근처에서 헌병차 사이렌소리가 계속 울려 집식구가 나가 봤더니 지프를 몰고온 헌병이 『장창국 작전국장댁이 어디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나는 허겁지겁 작업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이때가 상오 10시30분쯤으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9·28 수복 때까지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고 지냈다. 서로의 생사를 알 수도, 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화제를 잠깐 바꾸어 북괴의 남침준비 상황을 간략하게 훑어보고 넘어갈까 한다.
48년 12월 중순 소련과 중공·북괴는 비밀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특별군사 사절단을 북괴에 파견하고 49년부터 18개월 안에 북괴의 군사력을 남침에 충분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로 약속을 했다고 한다. 또 중공은 한국계 중공군 2만∼2만5천명을 북괴에 파견, 인민군의 중심을 이루게 하는 한편 북괴는 8개 전투사단과 예비사단을 포함해 22개사단을 편성토록 했다.
이에따라 소련은 북괴에 2백42대의 전차와 1백대의 야크전투기, 48대의 연락기를 제공해 기갑여단과 비행사단을 만들었다. 당시 우리의 공군력이 조종연습기 22대와 1대의 전차도 없었던 허술한 대비를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형편이었다.
북괴는 50년 3월 중순부터 38선에서 5km 이내에 살던 주민들을 후방으로 소개한 뒤 민가에는 무장군인과 유격대를 주민으로 위장시켜 배치해 놓았었다.
50년 4월 중순에는 소련의 대형화물선 7척이 1백22mm 곡사포, 1백20mm 박격포, 45mm 대전차포, 중·경기관총, 소총·각종 실탄 등을 싣고 북괴의 동해안 각 항구에 도착했다.
6월10일 김일성은 갑자기 전방 각 사단장과 여단장들을 평양으로 소집, 비밀작전회의를 열고 구체적인 남침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6월11일 전군에 비상을 걸었다가 23일을 기해 비상해제를 했던 것이나 그들은 12일부터 23일 사이에 남침에 필요한 병력을 몽땅 38선에 집결시켜 놓고 D데이 H아워만을 기다리며 호시탐탐 기희만 엿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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