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신종 독감 대유행 가능성 높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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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독감 바이러스는 19세기 이후 최소한 네 차례 전 세계적인 대유행을 가져온 바 있으며 그때마다 지구 전체를 휩쓸며 수백만, 수천만 명의 인명 손실과 매우 큰 사회.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18년 스페인 독감, 57년 아시아 독감, 68년의 홍콩 독감 등 세계적 위세를 떨친 범유행의 예들은 현재의 조류독감처럼 모두 신종 독감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시작된 사례들이다. 항원의 변이에 따른 신종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인류가 감수성을 가지며, 사람 간 전파가 효율적으로 되는 경우 범세계적 유행을 일으킨다.

97년 5월 홍콩에서 비전형성폐렴으로 사망한 3세 여아에게서 조류독감 바이러스 A/H5N1이 처음 분리되었을 때, 세계보건기구(WHO)와 전문가들은 이 신종 바이러스의 범유행 가능성 때문에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홍콩에서만 18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6명이 사망했지만 이때는 사람 간 전파의 증거를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 12월 이후 태국.베트남.캄보디아.인도네시아 등에서 계속 유행하고 있으며 2005년 9월 말 현재 116명의 환자를 발생시키고 있는(이 중 60명 사망) 독감 바이러스 A/H5N1은 이번에는 분명하게 다른 종 간의 전파와 특히 사람 간의 전파에 대한 증거를 남기고 있다. 현재는 사람 간 전파의 효율성이 낮으나 바이러스의 특성상 사람 간 전파가 쉽게 이루어지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신종 독감 대유행의 가능성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신종 독감의 대유행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 위협이 된다. 세계보건기구와 선진 각국은 이미 90년대 말부터 신종 독감 대유행에 대한 구체적 대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수정 및 보완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예상되는 유행 단계별로 어떤 점이 부족한지 진단하고 점검하여 자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보건.의료적인 문제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예상되는 문제점들에 대한 것까지 세심히 점검하고 대비 훈련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조차 신종 독감의 대유행에 대한 대비가 충분치 않다는 자체 진단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신종 독감의 대유행이 온다면 전 세계는 준비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로 나뉘고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신종 독감의 대유행이 어떤 모습으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적 범유행 상황이 온다면 질병의 전파 특성상 지난번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유행처럼 국내 상륙을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철 일반적인 독감이 퍼져나가는 수준으로 바이러스가 퍼져나간다면, 국소적인 유행보다는 수주 만에 전국적인 유행으로 번지는 시나리오를 무시할 수도 없다. 현재 우리는 환자의 조기 발견과 관리, 유행 확대의 억제, 급증한 환자들에게 필요한 의료 자원의 공급, 유행 상황에서 사회의 필수 기능 유지 등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질병관리본부를 중심으로 범정부 차원의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천병철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