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김녕 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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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김녕은 김해의 옛 지명으로 한 고을의 두 이름이다.
그러나 김녕김씨와 김해김씨의 두가문은 그 근원을 달리한다.
무상한 역사의 흥망성쇠속에 수로왕계의 김해김씨가 역사의 표면을 장식하는 영화를 누렸다면 알지계의 김녕김씨는「사육신논쟁」을 불러일으켜 너무나 유명해진 김문기의 의거이후쓰라린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김녕김씨의 시조는 문열공 김시전.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인종때 묘청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금주군에. 명종때는 조위총의 난에 공을 세워 상락군에 봉해졌다.
그 후예들이 김녕을 본관으로 삼게된 것도 문열공이 금주군에 봉해진 연유.
여말 지명이 김해로 바뀌면서 김해김씨를 섬김으로, 김녕김씨 후김으로 구별짓기도 했으나 조선조 고종2년 본관의 혼돈을 피하기 위해 김녕으로 확정했다.
고려의 인물로는 문열공의 아들로 평장사에 이른 김향, 고려에 절개를 지키다 이방원· 정도전에 살해된 향의손자 김귀갑 (밀직부사). 공민왕때 홍건족을 토벌하고 괴승 신돈의 피폐를 막은 귀갑의 아들 법부상서 김정병등이 김문을 빛냈다.

<「김녕」은 옛「김해」>
쇠잔한 고려와 개국을 앞당기려는 조선조의 여명이 교차하는 시기에 김문은 참여와 충절의 필연적인 갈림길에 마주했다.
향의 현손 김광저를 비롯해 김단원·김질등은 부규군의 충절로 은거, 절의를 지킨 고려조의 충신.
공민왕때 판도판서를 지낸 광저는 무록산에 들어가 태종의 이조판서 제의를 무색케했고 김질도 태조가 분성군에 봉하고 예조판서의 버슬로 불렀으나 끝내 아산 도설산에 은거, 수절했다.
김질의 아들 익생은 장효로 정려되고 후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공을 세워 좌찬성에 이른 김인찬은 참여의 개국l등공신. 일찌기 무파에 등과,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고 이성계와는 결의형제를 한 사이였다.
또 정병의 아들 김윤달은 개국후 형조판서에, 그의 아들 석동은 이조참의에 올랐다. 석동은 세종때 「치평요람」등의 편찬에 참여했고 김종서가 육진 개척,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정할 때 공을 세웠다.

<참여·충절로 고뇌>
이렇듯 탄탄한 세도가도를 달리던 김문의 성휘은 단종복위거사를 분기점으로 수난속에 충절을 빛낸다.
단종븍위거사의 주역 김문기는 이조판서 김관의 아들.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강탈하자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등과 모의, 세조거세를 꾀했으나 김발의 밀고로 아들 현석과 함께 순절했다.
영조7년 후손 김정구의 호소로 복관작될 때까지 김녕 김문은 유배당하거나 산중에 피하여 본관을 숨기며 고난 속에 명맥을 이었다.
김문기의 충절은 오랫동안 묻혀 있였으나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의 판정으로 육신묘역에 가묘가 마련됐었다.
김문기의 가문은 부자와 함께 손자 충주·증손 현남·현손 약전등이 충과 효의 맥을 이어 전대미문의 오세충효정각이 세워졌다.
김문기와 동시대인으로 단종이 죽자 3년간 복상, 세조의 좌의정 권고도 고사한 김준, 사마시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념한 김현등이 또한 김문의 충절이다.
김녕김씨는 임란을 전후해 새로운 운세를 맞게된다.

<「오세충효」 돋보여>
김응수는 삼형제가 임란에 전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고, 호성공신을 지냈으며, 김유부는 노모를 업고 대구팔공산에서 적을 격퇴했다.
노량대첩때 충무공진중에서 무공을 날린 김언공도 역사에 남은 이름이다.
김유부의 두 아들 기남· 난생 형제는 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절했고 두 자부는 열녀로 정문이 세워져 양대에서 「삼충일효양렬」로 기록되고 있다.
근세의 인물로는 김양배가 한일합방이 되자 절명시을 남기고 순절했고 김주종은 광복회를 조직,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순국했다.
벽산 김도현은 일제에 항쟁, 의병을 일으켰다가 과부족으로 패하게되자 『시신이라도 왜적의 손이 닿는 것은 싫다』 며 바위를 매고 동해바다에 투신한 의사.
해방후 김문은 정계와 관계·법조계에서 두드러진다.
전신민당총재· 외무부장관을 지낸 김홍일은 한국광복군참모장출신으로 건국의 산파역. 육군중장으로 예편한 4선의원인 전신민당원내총무 김형일과 사단장을 지낸 김용규는 6·25동란때 전공이 많았다.

<정·관계 진출 많아>
김창규·김성별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 오늘의 보라매를 키우는데 기여했다.
관계에는 교통부장관을 지낸 김석관과 문교부장관을 지낸 김법 이 있고 법관의 귀감으로 법조계의 숱한일화를 남긴 김홍변(전서울고등법원장) 김용찬(초대 서울지검장) 등이 이미 고인이 된 인물들이다.
현직에 있을 때「사형수의 대부」로 불리던 김홍변은 출장중 지방 경찰서장이 점심을 내는 자리에 도시락을 내놓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박봉에도 연고없는 죄수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전신민당총재 김영삼과 제3공화국의 건설부장관·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대규도 김녕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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