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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가 말하는 아리랑 공연 학생들의 고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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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아리랑 공연 카드섹션에 동원된 북한 학생들. 색지를 붙여 책 모양으로 만든 카드를 신호에 따라 한 장씩 넘겨가며 선전 구호나 화면을 연출한다. [민족21 제공]

"배경대 아이들은 중간에 휴식시간이 없어 몇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 깡통을 가지고 다니며 (소변을)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그냥 참아버린다. 그러니 방광염 같은 병이 걸린다. 본행사 때는 꼼짝도 할 수 없어 그 자리에서 싸버리는 경우도 있다."(유지성.39)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얼굴이 등장하는 (카드섹션)부분을 맡은 경우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카드를 잘못 넘겨 얼굴에 흠집이라도 생기면 큰일나기 때문이다."(정모.36)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아리랑 공연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2만여 명이 동원된 대규모 카드섹션. 스탠드에 앉은 어린 학생들이 형형색색의 카드로 폭 100m가 넘는 현란한 화면을 시시각각 바꿔가며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면에는 참가 학생들의 남모를 고통이 담겨 있다고 탈북자들은 말한다.

북한 전문 사이트인 데일리NK(www.dailynk.com)는 행사 참여 경험이 있는 탈북자 10명의 생생한 체험담을 7일 공개했다. 지난해 입국한 정모씨는 1989년 5만 명 규모의 한 행사에 참가했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정씨는 "카드가 250장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께는 15~20cm, 무게는 10~15㎏ 정도 된다. 그것을 매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은 고통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넓은 배경대에서 잘못된 곳을 어찌 그리 잘 찾아내는지, 동작이 틀리면 가차없이 선생의 몽둥이가 날아오고 집단으로 기합을 받기도 한다"고 전했다.

99년 입국한 김성민(44)씨는 "능라도 경기장에 들어서면 카드를 올려놓는 받침대가 있다"며 "수천, 수만 명이 한꺼번에 카드를 넘기니까 '쫙'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것만 들어도 외부인들은 전율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카드를 만드는 것을 작도(作圖)라고 하는데 국가에서 색지와 풀 등이 지급되면 개인이 작도한다"고 덧붙였다.

평양 대동강 구역에 살던 이모(35.여)씨는 "5개월 정도는 오전에 수업하고 오후에 훈련하지만, 행사 한 달 전부터는 하루종일 훈련을 한다"고 말했다. 또 "연습기간 중 70~80%는 밤 12시까지 연습했다"며 "처음엔 코피를 쏟고 쓰러지는 아이가 속출하지만 몇 달 지나면 단련이 되는지 그런 아이들이 없다"고 했다.

연습기간 중 점심은 도시락으로 때우지만 저녁식사는 따로 없다. 자정까지 굶으며 연습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북한 아이들은 당과류(사탕 등)를 먹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중간에 간식으로 지급되는 빵과 당과류는 유일한 기쁨"이라며 "그걸 먹기 위해 고통을 참는다"고 회상했다. 당과류를 먹지 않고 싸뒀다가 동생에게 갖다주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평양 삼석구역 출신 박모(37.여)씨는"외곽 지역에 살아 집단체조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행사에 동원된 사촌이 오늘은 무슨 당과류를 먹었다고 자랑하는 통에 샘이 나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박씨는 "돌이켜보면 집단체조는 아이들의 혼을 빼놓는 행사"라며 "그런 걸 보겠다고 돈을 내고 가는 사람이 있다니 한심스럽다"고 비판했다.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집단체조에 동원되는 아이들도 힘겹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2003년 입국한 김성식(39)씨는"철봉에 안전대를 묶고 10회 이상 돌다 보면 팔이 빠지는 것 같고 나중에는 원숭이처럼 철봉에 둥둥 매달리게 된다"고 말했다.

집단체조 창작단에서 체조 안무를 담당했던 오영희(35.여)씨는 "공연을 보러가는 것은 자유겠지만 고생하는 북한 주민들도 생각해 줬으며 좋겠다"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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