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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새지도(12)원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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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해 10월12일 여의도 전경련회관 2층 회의실에서 역대 「재계총리」4명이 모처럼 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다.
전경련 초대회장을 지낸 이병철삼성회장, 2·3대회장을 지낸 이정림대한선박회장, 4·5·9·10·11·12대회장을 역임했던 김용완경방명예회장, 그리고 13대 이 후 현재의 16대까지 회장직을 맡아 오고 있는 정주영현대그룹회장등 좀처럼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이들 4명의 재계인사들이 이날 자리를 함께 한 것은 전경련 20년을 회고하기 위해서였다.

<일경단련입김 막강>
6·7·8대 회장을 지낸 홍재선씨는 작고했다. 이 날 이들은 한국경제계가 걸어 온 길과 걸어갈 길을 이야기했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그만한 비중을 갖는다.
역대전경련회장을 지낸 이들은 조야간에 모두 한몫 놓아주는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인들이다.
일본의 경단련회장엔 못미치지만 전경련회장은 여러가지면에서 큰 무게를 갖는다 오랜 보수의 전통속에 타협정치를 펴고 있는 일본에선 재계총리인 경단련사장의 입김은 막강하다.
일상적인 정책은 물론 정권의 향방까지도 좌우한다.
관주도경제인 한국에선 전경련회장이라해도 결정적인 것은 사후통고 받기 일쑤다.
그러나 전경련회장으로 대표되는 재계의 협조 내지 양해없이 경제정책을 강행하기는 불가능하다. 한 없이 밀리는 것 같지만 어찌보면 한없이 강한 것이 한국재계의 묘한 특성이다.
재계를 누가 대표하느냐를 놓고 은연중에 신경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순수민간단체라는 점에서 전경련의 비중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10·26후 세대교체바람을 타고 다른 경제단체의 장은 다 바뀌었으나 전경련만은 안 바꿔었다.
설혹 위에서 지명되어 앉는다 해도 여러가지 재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제대로 일을 못하는 자리가 전경련회장이다. 전경련회장은 우선 재력의 기반이 있어야 하고 또 재계가 납득해야한다.
전경련회장은 이미 그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만이 앉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도 그만한 비중을 갖는다.
따라서 역대전경련회장의 모임은 보통의 모임과는 다르다. 사실 현재 재계의 중요한 일이 김용완·이병철·정주영·이정림씨와 의견조정을 통해 일단 방향이 걸정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재계의 영향력은 재력에 많이 좌우되는데 이병철·정주영씨는 4대그룹의 하나인 삼성·현대를 각각 대표한다.
이정림씨가 전경련회장을 할 때만 해도 이회장의 대한양탄그룹이 한국경제계에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신흥세력에 밀려 밑으로 처지고 이회장자신도 건강이 별로 안좋아 재계 일선엔 잘 나서지 않고 있다.
또 다른 4대그룹을 대표하는 구자경럭키금성회장이나 김우중대우회장은 아직 재계의 대표자리에 나서기를 사양하고 있다.
구자경씨는 딱딱한 자리보다 분재나 원예를 더 즐기며 창업2세라는 점도 있다. 김우중씨는 장유유서가 엄한 한국재계에서 젊은 나이 때문에 4대그룹의 하나인 대우의 총수지만 늘 윗자리를 사양한다.

<밀리는것 같지만…>
10·26후 중화학통합조정과정에서 다른 경제인들과 한번 충돌을 겪은 후 국내 보다 주로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역대 전경련 회장들이 재계총리로서 벌인 사업과 대외적인 활동은 물론 그때 그때의 국내외 정치·경제 상항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각자의 성격과 스타일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병철 삼성그룹회장은 당시 최고회의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지명되어 내려와」전경련의 초대회장을 지냈다. 자신의 사업과 취미 말고는 일체의 공직을 맡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전경련 초대회장 1년이 처음이자 마지막 공직이다. 반면 이회장은 정치와 경제상황에 가장팽팽한 긴장이 감돌 때 재계의 일선에 나서 오늘날 재계의 초석을 놓는 어려운 역할을 해냈다. 어찌보면 이회장은「긴장」의 묘를 살리는 기업인이다.

<재력기반 없인 곤란>
삼성그룹을 일으켜온 그의 경영스타일 자체가 항상 늦추어지지 않는「긴장」으로 일관되어왔고 간혹 대외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그의 모습과 인상에도 조금의 빈틈이 없다. 전경련회장단의 모임에 그는 아주 간혹 나오지만 일단 참석을 하면 틀림없이 정각에 모습을 나타낸다.
77년 중동붐을 타고 일약 재계정상에 올라선 현대그룹의 정주영회장은 지난 77년이후 4대째 전경련회장직을 맡고 있다.
정회장은 선이 굵고 텁텁하며 유조선의 스크루와드 같은 추진력을 갖춘 기업인이라고 할수 있다. 비서진들이 따라 붙는 것을 때로는 성가시어 하기도 하는 정회장은 그만큼 그의 언행이 많이 노출돼 있는 편이고 텁텁하면서도 재치있는 농담으로 사업상의 어려운 고비와좌중의 긴장을 풀어가는 스타일이다.
숙원이던 전경련회관을 지은 것도 정회장이 전경련을 맡고 나서고 지난 80년이후 전경련이 줄기차게 정부를 상대로 고금리·고세율의 시정, 금융자율화, 민간주도경제로의 전환등을 건의, 오늘널날 상황을 얻어내는 데도 정회장의 힘이 컸다.
한편 김용완회장은 국내 재계 원로중 기업가의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과 가장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 원로라 할 수 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김회장은 중간에 서서 조정과 화합을 이끌어 냈다. 김회장의 원만한 인품 때문에 큰 그룹을 대표하지 않아도 강제로 떠받들리다 시피하여 최장수전경련회장을 지냈고 지금도 재계의 어른대접을 깍듯이 받고 있다. 최근 기업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김회당은 여전히 전경련의 중진회의에 자주 참석하며 중진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고 국공자문위원으로서의 일도 보고 있다.
김회장의 재임시절 이루어진 8·3조치와 한일경협, 한국개발금융주식회사(현 장기신용은행)의 설립등은 김회장의 원만한 영향력이 이끌어낸 전경련의 값진 수확이라 할 수 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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