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의 詩세례' 는 누구나 받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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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공부하지 않고는 기본적으로 이 땅의 시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리 근.현대 문학사에서 이만큼 동시대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준 시인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많은 시인에게 영향을 주었지요. 그와 시풍이 전혀 다른 시인에게서조차 그의 시적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시인 오봉옥(42)씨가 '오봉옥의 서정주 다시 읽기'(도서출판 박이정)를 펴냈다. 8백여 편의 시 중 미당이 스스로 골라 엮은 시선집 '푸르른 날'의 시 80여 편을 한 행 한 행 꼼꼼히 감상하고, 해석한 이 책에서 오씨는 "미당 문학은 근.현대의 고전으로 삼을 만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2000년 말 미당이 타계하자 그의 문학과 행적을 놓고 극렬한 찬반 논쟁이 일었다.

참여문학 쪽에서는 친일과 군부독재 옹호 등 행적을 문제 삼아 그의 시를 폄하하고, 순수문학 쪽에서는 시 자체에 중심을 둬 '시인부락의 족장'등으로 치켜세웠다. 그 상황은 지금도 비슷하다.

이런 때 참여.진보 문학 쪽의 중견 시인인 오씨가 "동시대 시인 중 미당 시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미당 시를 고전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것이다.

1985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한 오씨는 '지리산 갈대꽃' '붉은 산 검은 피' 등의 시집을 펴내며 필화도 당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도 맡았던 진보적 시인이다.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빠알간 불 사르고,/재를 남기고,//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결국은 조금씩 취해가지고/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목아지여/목아지여/목아지여/목아지여//멀리 서 있는 바닷물에선/난타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일제에 의해 신문들이 강제 폐간당하자 미당이 40년에 쓴 시 '행진곡'을 오씨는 이렇게 감상하고 있다.

우선 이 시를 읽으면 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때 TBC 아나운서의 떨리는 목소리 '안녕히 계십시오'와 함께 화면이 꺼지는 '지지직'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고 한다. 그리고 '잔치는 끝났더라'고 체념조로 이루어진 도입부에서는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생각난다고 했다.

'결국은 조금씩 취해가지고/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에서는 신경림 시인의 '파장'이 떠오르고, '목아지여'라며 절박했을 때 단순하고 직접적인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터져나오는 데에서는 김지하 시인의 담시 '비어'가 떠오른다고 오씨는 말한다.

저 70~80년대 유신.군부의 암흑 시대 김지하 시인의 민주화를 외치던 시들처럼 모가지만 남은 상황 속에서도 뭔가 발언을 해야했던, 그렇게 산화(散華)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형상이 '행진곡'에도 그려진다는 것이다. 해서 오씨는 '행진곡'을 "비관적 세계인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열망을 안으로 가지고 민족 현실의 구체성을 부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당신 같은 대표적 진보 시인이 미당을 상찬하고 나서면 적잖은 파문을 각오해야 할 것 아니냐"는 질문에 오씨는 "작품이 뛰어나면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자신도 미당의 시 1백여편을 필사하며, 줄줄 외며 시 창작 공부를 했듯 빼어난 시적 역량으로 동시대 시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미당의 시를 정치적.이념적 잣대로 더이상 폄하하거나 외면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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