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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없이 들어도 좋은 음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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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태생의 건반악기 연주자 겸 음악학자 완다 란도프스카 (1879-1959).

음악가 친구 중 한 명.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음악 듣는 걸 무지 싫어한단다. 음악을 들을 땐 오로지 공부의 목적이라는 거다. 이해는 간다. 나도 무심코 음악을, 그것도 내 전문 분야인 클래식음악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이 곡이 알고 보니 이런 구조였네’ 하며 괜한(?) 깨달음을 얻는다든가 직접 연주해 본 곡에선 ‘이런 해석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식으로 직업병이 발동해 음악감상의 본래 목적을 해침과 동시에 하고자 했던 다른 일마저 방해를 하고 마니…. 그러고보니 나도 바쁜 일상을 살거나 무언가에 집중해야 할 때, 혹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땐 그저 조용한 쪽을 더 택한다. 그런데도 나는 평소에 음악을 꽤 자주 듣는 것 같으니…. 도대체 언제 어떤 순간들에서 음악을 틀더라?

한창 직소(Jigsaw)퍼즐에 빠진 때가 있었다. 조각이 천개가 넘는 퍼즐을 맞출 때는 늘 알리시아 데 라로차가 연주하는 알베니즈와 그라나도스의 피아노 음악들을 틀었다. 청순한 건지 섹시한 건지, 따스한 건지 도도한 건지 잘 모르겠는 데 라로차의 연주를 듣다보면 어느샌가 나도 이 세상에 그리 크게 걱정할 일이 뭐가 있나하는 기분이 들며 시간도 금방금방 잘 가는 거다.

단 특별히 설파하고자 하는 내용 없이 좋은 게 좋은 거지하는 것 같아 자칫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음악을 심각한 제스처 하나 없이도 진정한 고전음악의 정수로 그려내 몇번이고 반복해 듣게 만드는 건 데 라로차만의 마법이 틀림없다. 그러고보니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중엔 여자가 꽤나 많은 셈이다. 남녀 비율이 9:1이 채 될까 싶은 전통적 성비를 생각하니 더더욱 그렇다. 나 스스로의 지향점이 여성적인 연주도 아닐 뿐더러 그녀들의 연주가 여성적인 것도 결코 아니니 그저 우연이려나? 아무튼 또 한 사람이 더 있다. 완다 란도프스카. 1879년생이니 나보다 100년도 더 전에 태어난 그녀는 하프시코드 겸 피아노 연주자이기 이전에 바로크 음악 학자이기도 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최초로 녹음하기도 했으니 한마디로 20세기 초반의 인물들 중에선 베토벤 이전의 바로크 및 고전시대 음악에 가장 정통한 음악가였던 셈이다.

그런데 막상 이런 사실을 알고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 “엥?” 할지도 모르겠다. 모차르트 협주곡 제22번 E플랫장조의 실황음반은 특히나 우리 상상 속에 존재하는 딱딱한 시대악기 연주들과는 간극이 너무 크다. 모차르트 시대의 피아노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음역대까지 넘나드는 현란한 장식음에 쇼팽을 연상시키는 카덴차는 요즘이었다면 ‘지적이지 않은 연주’란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연주자 본인의 타고난 스타일과 동경하는 스타일, 또는 연구한 이론과 지향점 등등이 모두 상응하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 속 그녀는 ‘모차르트는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는 이론은 단 한번도 배운 적 없는 사람처럼 자유롭다. 그저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를 보는 것 같아 절로 미소가 새나오게 만드는 그녀의 연주는 내 스승 아리에 바르디의 명언으로 설명해야 할까?

‘음악가의 지식이란 그저 직관을 자유롭게 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 이 음반을 그렇게 사모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이런 방식으로 연주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 나 역시 지향점과 취향이 맞지 않을 때도 많다. 같은 맥락으로 난 기돈 크레머가 이끄는 크레머라타 발티카가 연주한 비발디와 피아졸라의 ‘팔계(Eight Season)’ 음반을 매우 좋아한다. 특히 청소를 할 때 여지없이 이 음악을 튼다.

어떤 부담도 느껴지지 않는 쾌청한 연주는 다른 비발디의 사계 음반들과 비교하면 연주 속도부터 너무 빨라 전통적인 해석에 익숙한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도 있다. 처음엔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창문을 열고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를 맞아들이며 온 집안 구석구석의 묵은 먼지를 모두 털어내는 기분에 이 음반만큼 잘 들어맞는 것이 없으니 어쩌랴.

물론 음반의 하이라이트는 비발디가 아니라 피아졸라다. 비발디의 계절 하나, 피아졸라의 계절 하나를 병치하고 있는데 비발디의 ‘봄’ 다음에 오는 피아졸라의 계절은 ‘봄’이 아닌 ‘여름’이다. 비발디의 ‘여름’ 다음에는 피아졸라의 ‘가을’, 그럼 맨 마지막 비발디 ‘겨울’ 다음은? 물론 피아졸라의 ‘봄’이다. 곡 순서만으로 이토록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다니! 그러고보니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나도 모르게 낙관적인 기분을 주는 음악을 찾아듣고 있었던 걸까. 언제 들어도 기분이 나아지기에 장시간 여행 중에 특히 많이 듣는 음악은 걸슈인의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다. 이 곡은 스스로 연주하는 것도 좋아하고, 그래서 현존하는 거의 모든 음반을 다 찾아보기도 했지만 나에겐 얼 와일드가 아서 피들러 지휘의 보스톤 팝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RCA빅터사반의 아성이 너무 견고하다. 얼 와일드는 겉보기에는 영 다를지 몰라도 내게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모던 버전처럼 보인다.

스트라이프 수트를 조금은 느슨하게 차려입고 시가를 문 노중년 남성이 옆자리의 소녀에게 “얘야, 살기란 참 힘들지? 그런데 또 그렇게나 힘든 건 아니란다”하듯, 그 주체 못해 뚝뚝 떨어지는 여유가 너무나 닮아서. 루빈스타인의 쇼팽이 흑백TV의 아련함을 품었다면 걸슈인이라는 컬러TV를 제대로 만난 얼 와일드의 연주는 파릇파릇한 근육질의 청년 스타일 연주들에서는 미처 존재도 몰랐던 매력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날 수 밖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도 그저 좋을 밖에.

손열음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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