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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고민 - 노(老)테크] 중. 노후 준비에 허리가 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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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진국에서도 노후가 불안해짐에 따라 '고령 취업'이 늘고 있다. 사진은 일본의 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인들. [중앙포토]

미국 뉴저지에서 전자회사 엔지니어로 일하는 제이컵 레널즈(41)는 연봉이 8만 달러지만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드물게 은퇴한 부모님으로부터 해마다 1만7000달러를 보조받는데도 그렇다.

레널즈는 한해 3만4800달러를 집 살 때 빌린 돈을 갚는 데 쓴다. 보험료와 각종 요금, 집과 자동차 유지 비용만 1만1700달러다. 대학 때 빌려쓴 학자금도 아직 상환 중이고, 딸 교육비와 카드 결제대금도 내야 한다. 생활.여가비로 쓸 수 있는 돈은 연간 1만6000달러 정도다. 적자를 면하기 급급해 따로 노후 대비를 할 여력도 없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부동산값이 많이 오르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노후 대비에 대한 고민에는 국적이 따로 없다. 한국보다 고령화와 저금리를 먼저 겪었던 미국과 유럽도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건물 앞 인도에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기념하는 표석이 깔려 있는 뉴욕 맨해튼 로타운의 미국 보험정보센터. 9.11 테러의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를 지척에 둔 이곳에서 만난 스티븐 와이스바우트 박사는 "미국에서 노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와스프(WASP.기독교를 믿는 앵글로색슨계 백인)를 중심으로 하는 상위 10%뿐"이라며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게 문제인 하위 30%는 노후를 대비할 경황이 없고, 60%의 중산층은 불안해하고만 있다"고 말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HSBC그룹의 제프 그룩 은퇴비즈니스 담당 부장의 얘기도 같았다.

"노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세 부류다. 기업연금과 개인연금을 착실하게 붓는 사람, 돈만 모이면 놀러다니는 사람, 걱정만 하고 대책은 없는 사람이 그것이다."

고령화는 국가가 더 이상 국민의 노후 생활을 책임질 수 없게 했다. 독일은 2001년 연금제도를 바꿔 퇴직 직전 연봉의 70%를 주던 것을 67%로 줄였다. 2030년엔 46%까지 줄일 예정이다. 근로소득의 평균 12.4%를 사회보장세로 거둬 연봉의 60%가량을 국민연금으로 주고 있는 미국 역시 2017년부터 재정이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돼 세율 인상과 연금 축소를 검토 중이다.

일본 피델리티 재팬의 구라모토 야스오 부회장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단카이 세대)가 올해 60세가 되면서 은퇴하기 시작했다"며 "노년층 부양 부담이 갈수록 커져 젊은층일수록 노후 대비가 힘들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후 대비를 나라에 기댈 수 없게 된 상황은 가계 스스로 노후 대비에 나설 수밖에 없게 한다.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은퇴를 늦추거나 확정금리 상품보다 주식과 펀드 등 투자상품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다.

런던 근교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사이먼 글레이즈(37)는 은퇴 뒤를 대비해 4중으로 저축을 하고 있다. 국가 연금은 기본이고 이자율이 높은 인터넷 은행 예금과 비과세 적립식 펀드, 정부에서 세제혜택을 주는 국민저축증권(NSC) 외에도 따로 주식과 펀드에 투자하고 있다. 그는 "젊을 때 일찍 노후 대비를 시작한 데다 여유자금을 최대한 저축과 투자로 운용해 노후 생활에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고용 불안과 성장 둔화로 60세 미만의 취업률이 꾸준히 낮아지고 있지만 65세와 70세 남성의 취업률은 85년 각각 30.5%와 15.9%를 기점으로 오히려 높아져 현재 30%대 중반과 20% 초반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 증권업협회(SIA)에 따르면 미국 가계의 금융자산 중 은행 예금의 비중은 75년 55%에서 지난해 27%로 급감했다. 반면 주식과 채권.펀드 등 증권자산의 비중은 45%에서 73%로 급증했다.

독일에서도 2001년 17%에 불과했던 기업연금 가입률이 지난해 42%로 급증했다. 74년 기업연금을 도입한 네덜란드는 이 비율이 96%에 육박한다. 일본 역시 2003년 전년 대비 5.1% 증가하는 데 그쳤던 개인투자자들의 주식 보유가 올 3월 말엔 1년 전보다 270%나 늘어났다.

프랑스계 보험그룹 악사어드바이저의 박종호 회계사는 "어차피 개인이 스스로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면 주식과 채권.펀드.부동산 등으로 투자 대상을 다양화해 투자위험을 줄이고 안정적 수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을 때는 주식 등 공격적 투자 은퇴 전엔 채권 등 안정적 운용" 와튼스쿨 미첼 교수 조언

"국가가 노후를 책임져 주는 시대는 선진국에서도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개인 스스로 노후를 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와튼스쿨)의 올리비아 미첼(보험 및 위험관리.사진) 교수는 노후 해법으로 '유연하고 다양한 투자'를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미국에서는 어떻게 은퇴 이후를 준비하고 있나.

"정부연금과 기업연금(401K), 개인저축 등 크게 세 가지다. 정부연금은 정부가 해마다 지급액을 추산해 그만큼을 사회보장세로 거둔다. 현재 소득의 평균 12.4%를 내고 있다. 기업연금은 퇴직금 조로 해마다 일정액을 기업이 출연한다. 현재 은퇴자금의 60~70%를 이 두 연금이 차지한다. 나머지는 개인이 따로 준비해야 한다."

-이 정도로 노후 대비가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우선 정부의 연금 재원이 점점 빠듯해지고 있다. 2017년부터 적자로 돌아설 전망이다. 세율을 올리거나 지급액을 줄여야 하는데 둘 다 쉽지 않다. 기업연금도 일정 금액을 보장하는 확정지급형에서 일정 금액을 출연하는 확정기여형으로 바뀌고 있어 개인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미국 가계의 노후 대비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다수 직장인이 401K 등을 통해 주식과 펀드에 투자하고 있지만 자금 마련과 배분을 함께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현재 은퇴자금이 수십만 달러가 있다고 해도 10년을 버티기 힘든데 당장은 큰돈처럼 보이니 사람들이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선 종신연금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가입자는 소수에 그치고 있다."

-노후 대비를 위해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상황에 맞게 선택하고 수시로 재조정하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젊을 때는 자산의 90%를 주식에 투자하고, 은퇴를 목전에 두면 이 비중을 10%로 줄이고 채권에 90%를 넣는 식의 조정이 필요하다. 금리 변화나 각국의 경기 상황 등 세계적인 변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선진국, 기업·개인연금에 세금 혜택
노후 대비 지원 어떻게

선진국들은 국민연금 혜택을 줄이는 대신 기업연금과 개인연금에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개인들의 노후를 지원하고 있다.

미국의 기업연금(401K)은 1970년대 기업의 퇴직연금 부담이 한계에 도달하면서 도입됐다. 퇴직 이후 일정액을 매년 지급하는 퇴직연금은 시간이 갈수록 기업이 내는 돈이 늘어나는 구조였다. 대부분 채권 등에 투자해 수익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하고자 기업과 근로자가 일정액을 출연해 펀드 등에 투자하면 세금 환급 혜택을 주는 401K제도가 도입됐다. 1985년 1440억 달러였던 401K의 규모는 20년 만인 지난해 2조1090억 달러로 급증했다. 미국은 기업연금 외에 연간 2000달러까지 세금공제 혜택을 주는 개인퇴직저축(IRA)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사회보장의 발상지인 독일도 2001년 연금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국가가 은퇴 전 소득의 70%까지 보장해 주던 것을 2002년 이후 67%로 줄였다. 2030년 46%까지 줄일 계획이다. 국민연금을 내야 하는 나이도 기존 60세에서 65세까지로 늘렸다. 대신 개인들의 연금 가입을 장려하는 여러 제도를 도입해 2000년 17%에 불과했던 기업연금 가입률을 지난해 42%로 대폭 끌어올렸다.

일본도 연금 분야의 대수술이 예고돼 있다. 일본 우체국은 민간기업보다 높은 금리를 주며 연금을 팔았고, 지급도 국가가 보장해 왔다. 우체국에서 팔았지만 사실상 국가연금인 셈이다. 우체국 민영화로 정부가 지급을 책임지지 않게 되면 금리 인하와 수익률에 따른 지급 등 변화가 불가피하다.

출산율을 끌어올리려는 노력도 병행되고 있다. 영국에선 부모가 아니라 출생한 자녀에게 직접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영국 정부는 갓난아이에게 1인당 250~500파운드(약 50만~100만원)를 지급하고 있다. 돈은 아이 명의의 신탁기금 형태로 지급되며 아이가 성인이 돼야 찾을 수 있다.

HSBC그룹 제프 그룩 은퇴비즈니스담당 부장은 "부모가 일정액을 보태면 성인이 될 때 1000만원 정도의 목돈을 손에 쥐게 된다"며 "부모의 뭉칫돈 부담을 줄여 출산율을 높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표재용.나현철.이승녕.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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