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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사극 복식등 사실과 동떨어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요즈음 사극수준에서 보면 고증문제는 사증의 이해나 판단차이에서 생기는 게 아니고 신분의 상징이나 시대분위기 등 기성관념을 떨쳐내지 못한데 있는 것 같다.
몇가지 예를 든다.
①익선관〓유명한 이태조의 초상화 덕으로 익선관이 왕관을 상징하게 끔 되어서 그런지 KBS 제 1 TV의『개국』에서 공민왕이 익선관을 썼고 MBC­TV의『조선왕조오백년』에서 이태조 역시 익선관 차림이다.
그러나 공민왕 10년 (22일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조차 그 관은 없었으니 잘못된 분장으로 복두여야 합당할 것이다.
익선관은 세종 26년에 들어온 것으로 이태조가 벌써 그 왕관을 썼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어 공민왕 19년 이후에 사여 받은 원유관 차림이어야 옳다는 것은 이태조 초상을 훨씬 뒤에 그렸음이 뒷받침한다.
②사모〓『개국』『여명』『조선』에서 백관은 모두 뿔이 달린 오사모 차림이다.
『개국』에서의 관모는 청립이거나 복두여야한다 이규보(고종때 사람)의 시에 사모가 나오지만 명나라 것은 우왕때 들어왔기 때문이다
③승의〓『개국』『조선…』등에 나오는 승복은 회색인데 충혜왕 5년에 치의(검정옷)를 입게 한 것이나 승려초상화의 옷색을 보아서도 옳지 않다. 또『개국』에서 신돈이 흰수건을 맨것은 검은 승관이어야 어울릴 것이다
④정원〓고려 때의 정원양식은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했다. 백제때 노자공이 일본에 가 수미산과 못을 파 정원의 시초를 이뤘다는데 제석천이 있는 곳이 수미산이며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신돈이 왕자탄생을 위해 연복사에 수미산을 만들고 왕과 예불을 했다는 기록으로도 이해가 간다.
그렇게 본다면『개국』의 여러 정원은 계보에 안 맞고『여명』의 이판관집 정원은 이조식의 화계식이어야 할 것이다. 『여명』에서 태조상에 백관의 백사모 차림 등은 아직 그런 상제가 들어오기 전이니 틀렸고 민서의 남·청·분홍 등 옷차림도 시속에 벗어나 있다.
중문양식의 사대부 집이나 청자를 장식품으로 쓴 것은 청색을 천시했던 유교사상과 맞지 않다.
『조선…』에서 타이를 백으로 쓴 벽돌성은 정조 이후의 양식이어서『여명』의 벽돌담과 함께 잘못된 것이다
통도사에서 청자전이 나왔다지만 건물바닥에 깐 정도로 쓰여졌음은 박제가의『북학의』를 보아서도 알 수 있는 일 이다. 신규호<방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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