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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가 문을 닫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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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려나라 젊은이들에게 낭만과 시정을 심어주던 클래식음악의 산실「르네상스」(서울 종로1가 영안빌딩 4층) 가 32년만에 문을 닫게됐다.
격동과 혼란기에 생겨나 숱한 예술인과 젊은 남녀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이 고전음악감상실은 디스코등 핫 뮤직의 열풍과 오디오 문학에 밀려 손님을 잃고 시한부 운영의 진단을 받은 것이다.
르네상스는 디스크 수집가인 주인 박용찬씨(67)의 분신.
6·25동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951년 가을, 대구역앞 행촌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감상실 르네상스라는 이름은 박씨가 일본 동경에 바이얼린 공부를 하러 건너가 항상 즐겨 다니던 음악살롱의 이름을 딴것.
1940년 명치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박씨는 귀국할때는 그동안 모은 8천장의 디스크를 20여 개의 트렁크에 넣어 가져왔다.
1·4후퇴때는 트럭 2대에 레코드판만 8천장을 실어 대구로 피난 가 향촌동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시인 양명문·신동엽·김종문·장만영, 화가 김환기, 음악가 나운영·임원직, 영화인 장민호·신상옥씨등이 단골이었다.
또 각국에서 파견된 종군기자·고급장교 그리고 전쟁에서 돌아온 학도병·상이용사들이 들러 전쟁의 아픔을 심퍼니의 설음에 실어 달래기도 했다.
서울 환도후엔 인사동에 문을 열었다.
단골 의자차지 손님중 가장 눈길을 모았던 이는 독문학자로 염세자살을 한 전혜린. 그녀는 한곡이 끝나면 『에트랑제들이여 당신들의 낙원 르네상스에서』라는 메모를 주위에 돌리고 담배를 사서 배급하기도 했다.
또 베토벤의 5번 「운명이 시작되면 그녀 자신 지휘자가 되어 좌석에서 일어나 4악장 전곡을 열심히 지휘도했다. 당시 르네상스안에서는 누구하나 이런기행을 이상히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지금의 영안빌딩으로 옮긴 것은 60년12월. 딱딱한 나무의자에서 소파로 바뀌었고 미국의 「JBL-하스필드」대형 스피커가 설치됐다. 동양권에서는 유일하게 르네상스만 갖고있는 진품으로 이때가 르네상스의 최전성기였다.
이즈음 시골에서 상경한 대학생들은 르네상스의 전화를 빌어 신문에 가정교사 구직광고를 내고 이곳을 연락처로 상기도 했다.
요즘 이곳을 찾는 감상객은 하루50명정도. 입장료 6백원으로 한달평균 1백여만원의 적자를 보고 있다는것.
『이제까지 영리를 목적으로 르네상스를 운영한것은 아닙니다. 클래식 보급과 음악을 사랑하는 저 자신의 고집이었지요』주인 박씨는 적자의 폭이 점점 커지자 이제는 더이상 버틸 수가없을 것같다며 씁쓸한 표정이다. <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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