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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관계」디딤돌은 놓인 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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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중공양국은 8일 이틀간의 서울 대좌를 통해 중공여객기 납치사건의 원만한 처리에 합의함으로써 미 수교 상태인 양자관계의 발전에 조그마한 디딤돌을 마련했다. 양국이 이 번 사건수습을 위해 보인 자세와 입장이 여러모로 깊이 새겨 봐야 할만큼 전향적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 의연한 자세와 중공의 직접교섭 제의 및 대표단의 조속한 방한은 양자 관계의 앞날이 그리 어둡지 않음을 말한다. 우선 한국은 국제관례와 협약을 바탕으로 냉정하게 이 사건을 처리한 점은 주권국가로서의 의연 성을 내외에 보인 것이다. 즉 범인을 우리 재판에 회부키로 한 것이나 승객의 신상명세서를 중공 측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은 중공과의 관계개선의 필요성과는 별도로 챙길 것은 챙기고 따질 것은 따진다는 문명국의 일반적 관행을 그대로 실행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측은 회담결과를 합의각서로 받아 냈으며 그 각서에서△대한민국의 국호 사용을 관철하고 △범인들 인도에 대한 우리측의 입장을 고수했다.
국제관계에서 문서는 양자관계를 가름하는 척도인 만큼 우리측이 이번에 합의각서를 교환하고 더욱이 그 문서에 국호 사용을 관철한 것은 양자관계에 선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노명 수석대표가 9일『한-중공회담은 협상차원의 성질이 아니다』고 말한 것처럼 이번 사건처리는 우리가 항공기납치억제를 위한 헤이그협약에 준거해 조치를 취하는 것이므로 거기에 상대방의 주장을 수용해야 할 이유는 없다..
미 수교국간의 일이기도 하지만 조속한 사건해결을 규정한 항공기 납치와 관련한 국제협약상의 정신이나 유엔인권규약 등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이번 회담의 중공대표들에게 정부의 적법한 대표임을 증명하는 신임장 제출도 요구하지 않았다.
중공은 제3자에 거중조정을 의뢰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을 뒤엎고 사건당일 직접 우리측에 전문을 보내 대표단의 파 한을 제의해 왔다. 중공은 또「남조선」으로 호칭해 온 관례를 깨고 대한민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는 등의 놀랄 만한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이는 중공이 지난해 10월 중공조종사 오영근이 몰고 온 미그-19기의 반환을 위해 교섭하자는 우리 제의를 묵살했던 것이나 지금까지 우리 국호를 한번도 사용하치 않았던 점 등을 감안하면 의도된「변신」으로 볼 수도 있다.
반면 중공의 이 같은 태도가 사건을 가능한 한 조속히 수습하기 위한 고육지책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관측도 없지 않다. 중공으로선 △이 같은 사건이 초유의 일이며△승객 중에 고위인사들이 끼어 있을지 모른다는 관측△승객 중 망명의사표시가 나올지도 모르며△미 수교국인 한국이 비우호적으로 승객과 기체를 대만에 넘길지도 모른다는 등의 우려를 상정할 수 있다. 또 중공이 북한의 친소 화를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마찬가지로 한국카드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중공은 사건발생직후 서두르게 됐으며 이 같은 유연한 자세는 시한성 내지 단발성을 띨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분석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심도 중공수석대표가 착 한 이후 한 여러 차례의 발언가운데는 중공이 이번 사건을 빌미로 양자관계를 현실화하려는 의도를 엿 볼 수 있는 내용도 눈에 뛴다.
심 수석은 김포공항에 도착, 「가까운 비행장을 두고 돌아와야 하느냐』고 했다.
그는 또 9일 아침에도『빠른 시일 안에 북경과 서울을 잇는 직행항로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차례에 걸쳐 같은 내용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 중공의 대 한 실질관계에 대한 자세를 비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능하다. 그는 8일 밤 승객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협조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됐으며 돌아가 한국이 자유가 많은 나라라는 것과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리는 사실을 널리 선전하자』고 말했다.
이상의 말은 물론 공식석상에서 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확대, 유추 해석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심이 중공 측을 대표해 온 고위관리이며 항로개설 문제는 그 자신의 소관 사라는 점 등을 감안하면 가볍게 지나칠 수도 없다.
이 같은 중공의 태도에 대해선 이번 사건에서 북한이 관할공역의 피랍비행기를 저지 못해 드러내 놓고 불만을 토로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기회를 포착한 전격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또 우리 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한 점은 극단적인 국제법측면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중공이 한국을 지구상에서 없는 존재로 봐 왔던 대한 관을 사실관계로 끌어올린 것이며 나아가 양자관계의 실정을 내포하는 셈이 된다.
특히 중공은 제3자를 통한 교섭으로도 승객·승무원의 인도 및 기체반환이 다소 시간은 더 걸리더라도 가능했을 터인데도 직접 교섭에 나셨다는 사실은 한-중공관계에 뭔가 새로운 움직임인 것만은 틀림없다.
한·중공 양자의 관계는 모든 국가간의 관계와 같이 일편의 문서·일언의 약속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를 쌓아 가야 하는 축척으로 이루어진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성급한 기대나 지나친 낙관은 양자관계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모든 나라와 선린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맺으려고 하는 우리의 선의와 노력이 그들에게 얼마나 전해졌는가가 더 중요하다 하겠다.
이번 한-중공 직접교섭을 계기로 일고 있는 이 같은 부정적 또는 긍정적 전망은 앞으로의 중공의 대한 태도에서 판가름 나겠지만 양자관계가 앞으로 긍정적으로 진전될 경우 동아시아에 미치는 파장은 적지 않을 것이다. <이수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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