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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기지개 켜는 갈색 아침의 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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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이정헌
도쿄 특파원

일본인의 애완견 사랑은 각별하다. 동네 공원에 가면 사람 반, 강아지 반이다. 어린 아이처럼 유모차에 태우고 애지중지 돌본다. 고급 애완견 유모차는 50만원 넘는 비싼 가격에도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야외 놀이동산을 갖춘 애견카페는 연일 문전성시다. 구운 쇠고기와 으깬 감자 등 주인과 개가 함께 먹을 수 있는 5만~6만원짜리 패밀리세트는 인기다. 털 색깔과 생김새가 제각각인 개들의 천국이다.

  애완견을 끔찍이 아끼는 일본인들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날 갑자기 ‘갈색이 아닌 개는 모조리 없애라’는 무시무시한 법이 공표된다. 이른바 ‘갈색 법’이다. 검둥이와 흰둥이, 바둑이는 갈색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안락사시켜야 한다. 끔찍한 일이다. 동화책에서나 있을 법한 상황이다. 실제 그런 동화책이 있다.

 1998년 프랑스 소설가 프랑크 파블로프가 발표한 『갈색 아침』이다. 2003년 일본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저자는 프랑스 민족주의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이 선거에서 약진하자 강한 우려를 나타내며 책을 썼다. 갈색은 극우 이미지를 띤다. 독일 나치당의 제복이 갈색이었다. 요즘 일본인들이 『갈색 아침』을 다시 주목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군 위안부 강제연행 부정,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 등 우경화가 날로 심각해지는 것과 무관치 않다. 극우단체의 혐한 시위와 헤이트스피치(인종·민족차별 발언)도 일본 안팎의 강한 우려를 사고 있다.

 『갈색 아침』에 등장하는 정부는 급증한 개와 고양이 수를 줄인다는 명분으로 ‘갈색 법’을 발표한다. 과학자들은 갈색 고양이가 새끼를 적게 낳고 먹이도 조금 먹는다는 실험결과를 발표한다. 사람들은 잠시 당황하지만 곧 순응한다. 이를 비판한 신문은 폐간된다. 갈색 신문, 갈색 책, 갈색 술 등 온통 갈색만 남는다. 불안과 공포가 도시를 휩쓴다. 그러나 사람들에겐 저항할 힘도, 의지도 없다.

 일본어판은 출간 직후 8개월 만에 3만3000부 팔렸다. 당시는 무력공격 사태법과 국민 보호법 등 일본이 무력공격을 받을 때 국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법이 잇따라 만들어지던 때다. 그리고 지난달 10일 국가 기밀 누설 시 최고 징역 10년에 처하는 특정비밀보호법이 시행된 뒤 책은 또 입소문을 타고 있다. 홋카이도(北海道)신문은 지난달 말까지 총 6만 부가 팔렸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각종 정보를 길게는 60년까지 꽁꽁 묶어 둔다.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 자유는 국익 앞에서 힘을 잃는다.

 주인공은 “처음 갈색 법이 만들어졌을 때 안 된다고 말했어야 했다”며 뒤늦게 후회한다. “하지만 어떻게? 남들도 조용하게 사는 게 좋다며 수수방관했잖아.” 변명도 덧붙인다. 『갈색 아침』의 경고는 일본 내에선 아직 찻잔 속 태풍이다. 그러나 안보법제 정비 등 군사 대국화와 개헌을 향한 움직임이 본격화하는 2015년, 경고는 침묵의 찻잔을 깨고 초대형 태풍으로 일본 열도를 휩쓸지도 모를 일이다.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