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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두 종류의 양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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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호 27면

절집에서는 새해가 일찍 찾아온다. 동지 때 이미 신도들에게 새해 달력을 나눠준다. 어느 절이건 거의 예외 없다. 그래서 동지만 지나면 절집 안 분위기는 곧장 새해 분위기다. 매스컴에서 연말이라고 흥겨워할 즈음, 우리는 벌써 알찬 새해를 위해 이것저것 무언의 계획을 세운다. 개인적으로는 각자 품고 있는 이상을 향한 준비를, 대중적으로는 사찰 행사에 맞추어 전체 일정을 조율하기도 한다. 세상의 연말연시가 들뜬 시기라면, 절집은 심연의 깊은 침묵으로 차분하게 채워진다.

올해는 더욱 숙연한 연말을 보냈다. 한 번 앉으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절구통 수좌 법전 큰스님의 입적으로 인생의 허무감을 곱씹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했다. 법전 큰스님은 “사람들은 죽도록 마음 바닥을 알려 하지 않는구나” 하셨다. 세속의 단맛을 기웃거리느라 허송세월하는 이들에게 남긴 경책의 말씀이다. 되뇔수록 고개가 숙여진다.

큰스님 가신 허탈함 끝에 해가 바뀌었다. 희망과 새로움은 온데간데없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더 이상 나도 푸르게 젊진 않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늙지도 않았다. 아니 늙기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이 활동하거나 수행하기에 딱 좋을 때일지 모른다. 하지만 느낌은 달랐다. 그저 밋밋했다. 설렜던 일들은 무덤덤해지고, 일상에선 대수롭지 않은 일들만 점점 많아졌다. 오감이 둔해진 것일까. 생각하니 그건 아닌 듯하다. 오히려 예민해진 느낌이다. 그럼 왜지? 아마도 무채색 빛 출가자의 삶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이 더욱 뚜렷해진 것 같다. ‘조금씩 더 크고 담대하게 살고픈 마음, 사소한 일에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깊어졌다고나 할까.

지난해는 어려운 일이 많았다. 제아무리 개인적으로 성취감이 컸던 사람도 내놓고 기뻐하지 못했다. 공공의 슬픔과 분노가 컸던 탓이다. 그래도 어김없이 새해는 찾아왔고, 우리는 다시 희망을 얘기할 때가 됐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공공의 의무일지 모른다. 희망만이 절망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를 밝히는 등불이 될 테니까 말이다.

히말라야 고산족 얘기 중에 이런 게 있다. 고산족 사람들은 소나 양을 사고팔 때 가파른 산비탈에 묶어둔다. 그런 다음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함께 지켜보면서 가격을 정한다고 한다. 양이 산비탈 위로 올라가면서 풀을 뜯으면 아무리 비쩍 말랐어도 그 양은 후한 값을 쳐주고, 양이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풀을 뜯으면 몸집이 크고 털에 윤기가 좔좔 흘러도 그 양은 값을 싸게 친다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산 위로 올라가는 양만이 산허리에 있는 넓은 초원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물며 사람이랴. 우리도 마찬가지다. 쉽고 편한 길만 찾아 밑으로 내려간다면 그의 미래는 어둡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숨차고 힘들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올라갈 수 있어야 비로소 발전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2015년에는 부디 초라하게 살지 말자. 쉬운 길만 찾아가지도 말고,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내려가지도 말자. 사소한 일에 매달려 쪼잔하게 화내는 모습, 오직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 이런 삶은 너무나 초라하지 않은가. 매일매일 몸부림치며 도전하지 않아도 좋다.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리라 마음먹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생생하게 한번 살아보자. 우리 모두 아직은 더 멀리 갈 수 있지 않은가.



원영 조계종에서 연구·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아사리. 불교 계율을 현대사회와 접목시켜 삶에 변화를 꾀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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