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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 회항' 분노 폭발은 심리적 계약 위반에 대한 저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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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합병(M&ampamp;A)으로 몸집을 키워온 A사는 연 매출 규모가 조(兆) 단위를 넘어서면서 대외협력 전담 부서를 신설했다. 50대 팀장 B씨가 조직 신설과 업무 계획까지 마무리짓자 회사는 후속 인사를 했다. 대외업무 전문가라며 B씨보다 9살 젊은 외부 인물을 팀장으로 영입했다. B씨는 "회사에 심하게 배신감이 든다"며 "함께 고생한 후배들이 '힘 빼지 말고 70%만 일하자'고 할 땐 죄인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계열 C사는 지난해 말 인사에서 실적 부진을 이유로 상무급 임원 2명과 재계약하지 않았다. 동기들보다 승진이 빨라 소위 '잘 나가던' 임원들이었다. 그 중 한명은 '별'을 단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50대 초반인 이들 임원이 보따리를 싸서 나간 뒤 조직은 크게 술렁였다. 이 회사 부장급 간부는 "직원들 사이엔 열심히 일해 승진할 필요 없다며 '조진조퇴(일찍 승진하면 일찍 물러난다)'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털어놨다.

신설 팀장에 외부인을 영입한 A사, 실적 부진을 이유로 임원을 내보낸 B사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사원들의 사기를 꺾은 것일까. 두 회사 모두 노동법이나 근로계약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원들은 왜 회사에 배신감을 느끼고 심지어 일도 게을리하려는 것일까.
경영학이나 조직학에서는 이를 '심리적 계약(Psychological Contracts) 위반'으로 설명한다. 심리적 계약이란 직원과 회사간에 근로계약서나 연봉계약서 같은 명문화된 문서 형태의 계약은 아니다. 근로자 개인이 회사를 상대로 지니는 주관적·암묵적 계약이다. 조직에 헌신과 충성을 제공하면 어떤 보상을 받겠구나, 하는 막연한 심리적 기대감과 신뢰를 뜻한다. 조직과 개인은 호혜적 관계라는 근로자의 인식에서 비롯한다.

법적 책임 없으나 사기에 큰 영향

심리적 계약은 여러 이유로 깨지곤 한다. 근로자가 납득하기 어려운 인사, 갑작스러운 사내복지나 급여 감축, 대량 해고, 전근대적 기업문화, 사내의 부정부패나 비리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국내외에서 비난을 받은 대한항공의 '땅콩회황'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 전근대적 조직문화와 불합리한 경영관행이 빚어낸 스캔들이 기업 이미지와 근로자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점에서다.
근로자가 '회사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했건만 그에 맞는 대가와 보상을 받지 못했으니 불공정하다'고 인식하는 게 곧 심리적 계약 위반이다. 회사가 나를 배신했다, 회사에게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 회사를 믿지 못하겠다…. 근로자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심리적 계약 위반 상태에 빠진 셈이다.
심리적 계약 위반은 사기와 생산성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심리적 계약 위반은 단순 불만과는 다르다. 회사가 어겼으니 나도 어기겠다는 식의 적극적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정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장기간에 걸쳐 조직과 구성원 간 상호 의무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형성된 심리적 계약이 인사 조치 등을 보면서 갑자기 무너지면 불신감 고조, 성과 저하, 이직률 증가 같은 부작용이 도미노처럼 퍼진다"고 지적했다. '조진조퇴'나 '70%만 일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한 곳에서 생산성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심리적 계약에 대한 의존도는 전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고 사회안전망과 창업 기회가 부족할수록 높아진다. 익명을 원한 한 노무사는 "성장 속도가 떨어지고 취업난이 심각한 사회일수록 조직에 의한 심리적 계약 파기는 도드라져 보인다"며 "땅콩회항에 대한 분노가 삽시간에 퍼지고 드라마 '미생'이 히트한 것도 회사에 대해 을(乙)인 직장인들의 심리적 계약 위반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내 기업들이 외형 위주로 성장하면서 적정 인력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하지 않았고, 종업원도 '회사인간'으로 평생직장에 안주하면서 전문 노하우와 자립능력 배양에 소홀했다. 그러다 외환위기와 대량해고 사태를 경험하면서 심리적 계약의 기반인 상호 신뢰에 균열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한화그룹에 매각된 삼성토탈·삼성테크윈 등 삼성그룹 4개 계열사 직원들이 잇달아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연대투쟁을 예고하는 것도 '심리적 계약 위반'에 따른 저항으로 설명된다. 노조 관계자들은 "삼성맨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직장생활을 해온 종업원들이 어느날 갑자가 다른 회사 직원이 된다는 사실에 큰 상실감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손석원 삼성토탈 사장이 신년사를 통해 "피해의식이나 상실감, 분노, 갈등은 접어 두고 마음을 추스르자"고 다독인 것도 심리적 계약 위반에 대한 종업원들의 분노를 달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존중받는 직원이라는 느낌 줘야

일류 기업들은 심리적 계약을 사기 진작과 생산성 향상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스토리지 솔루션업체 넷앱의 경우 '직원이 최고의 자산'이라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사무실에 사장실·임원실이 따로 없고 직위에 관계 없이 평등한 복지혜택을 제공한다. 톰 멘도자 넷앱 부회장은 평소 "직원들은 더 나은 직책이나 연봉을 제안받았을 때가 아니라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 이직을 생각한다"며 "넷앱의 이직률이 낮은 이유는 직원을 존중하는 회사라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글로벌 화장품 회사 메리케이는 '골든 룰 경영'으로 유명하다. 이 회사는 직원이 해외 출장갈 때 일등석을 제공하고 방문판매 직원이 본사를 방문할 때는 캐딜락을 제공한다. 직원들에게 '나는 이 회사에서 존중받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비즈니스 솔루션업체 SAS는 '직원이 만족하면 고객도 만족한다'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업무환경과 복리후생을 점검한다.

심리적 계약을 중요시하는 조직일수록 구조조정에 신중하다. 자존심 손상, 무력감, 미래에 대한 불안이 종업원을 수동적·기회주의적 성향으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맥킨지 컨설팅의 제임스 비모스키는 "구조조정은 일종의 다이어트와 같다. 밥을 굶어 체중을 줄이더라도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6개월 후에 원래 몸무게로 돌아온다"고 지적한다. 경영마인드, 시스템, 체질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은 채 사람 머릿수만 줄이면 기업의 체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직안정과 건전한 위기감 조성→높은 사기 유지→높은 업적'이라는 선순환 관계를 작동시켜야 개인과 조직이 공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고용조정에 따른 후유증을 다시 고용조정으로 해결하려 하는 일이 반복되면 조직은 회생력을 상실하게 된다. 조범상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조기은퇴, 조기퇴직 강요는 당사자뿐 아니라 동료·후배 등에게 미치는 2차 피해가 크다"며 "기업은 근로자들 사이에 '어느 순간 나도 팽(烹) 당할 수 있다'는 간접경험이 확산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리적 계약도 주요 경영요소
심리적 계약 위반이 잦은 사회일수록 공무원처럼 안정성 높은 직업의 인기가 올라간다. 지난해 11월 한국경제연구원이 전국 19세이상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한 ‘기업 및 경제 현안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에 따르면 본인과 자녀가 참여하기 원하는 직업의 선호도 조사에서 공무원은 한해 전 34%보다 9%포인트 증가한 43%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23%), 대기업 취직(15%), 자영업·창업(10%) 순으로 조사됐다. 특이한 점은 다른 직업군의 선호도가 모두 내려간 데 비해 공무원만 유일하게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갈수록 고용 안정성을 직업 선택의 핵심 요소로 꼽는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도 심리적 계약을 전략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사·급여·복지 등 정책을 시행할 때 눈에 보이는 이익만 좇아서는 장기적으로 건강한 조직으로 성장하기 어려워서다. 조범상 연구원은 "고도 산업사회에서는 기업들이 구조조정 유혹에 더 쉽게 노출된다"며 "심리적 계약을 경영요소로 간주해 조직원들의 심리까지 살피는 섬세한 경영을 해야 더 강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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