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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직업 대신 일 찾기

중앙일보

입력

얼마 전 뉴스에 서울대 인문대 4학년 학생들의 취업난이 보도됐다. 학점과 토익 점수도 좋은데 번번이 대기업 취업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영향인지 서울대 인문대에 10학기 이상을 등록한 학생이 50%를 육박한다고 한다. 서울대만 들어가면 모든 일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더 나아가 대기업에 들어간다 해도 평생직장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영어유치원부터 시작해 특목고로 이어진 경쟁의 승리자들조차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공부로 경쟁해 좋은 직업을 갖는 패러다임은 이제 레드오션이다. 거시적인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절박한 시점이다.

한 세대 전과 비교해 사회가 완전히 달라졌다.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프레드 허시는 70년대 영국 사회를 분석했다. 그는 대다수가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자 도리어 결과에 대해 실망하는 풍요의 역설을 ‘성장의 사회적 한계’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경제성장이 일정 단계가 돼 대부분이 먹고살 만해지면 물질에 대한 욕구는 해소된 다음이므로 한정된 자원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욕구가 된다. 지금 한국 사회가 그러하다. 베이비붐 세대는 사회의 발전이란 큰 흐름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사회 발전의 큰 흐름에 동승하기만 하면 됐다. 이제 이들이 부모세대가 돼 자식에겐 물질적 풍요보다 지위를 얻기를 바라고 있다. 대기업·전문직·고급 공무원과 같은 한정된 수의 지위를 놓고 많은 이가 한 번에 경쟁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실제로 96년 양질의 일자리는 535만 개였는데, 대졸 노동력은 497만 명으로 수요가 더 많았다. 반면에 2010년 양질의 일자리는 581만 개로 비슷하나 대졸 노동력은 965만 명으로 공급이 초과된 상태다. 지위를 차지할 준비가 된 사람은 이전 세대의 두 배로 늘어난 반면, 자리의 숫자는 그대로다.

이전 세대가 양적 팽창이 일어나는 오르막 시대에 살았다면 지금은 모든 게 팍팍하고 촘촘해진 내리막 시대다.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야 할 때다. 열심히 노력해 경쟁에서 승리하면 물질과 지위를 얻을 것이란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한정된 지위인 ‘직업’을 쟁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KAIST를 졸업하고 컨설턴트로 일하다 지금은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제현주씨는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란 책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해 본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경험을 전하고 있다. 그녀는 고정된 직업 쟁취와 유지에 매달리기보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고민을 우선하라고 조언한다.

직업보다 일은 유동적이고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적절한 수준의 보상을 얻으면서 의미를 얻을 수 있다. 몰입의 경험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일을 시도하고 동시에 해나가는 것이 지금 젊은 세대가 나아갈 삶의 방식이 돼야 할 것이다. 이젠 한 직업 안에 머무르는 정착민이 아닌 주도적 노마드(nomad·유목민)로 살아야 한다.

평생 직업이란 개념에서 벗어나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도 있다. 일을 하다가 다른 일로 갈아타는 유동성을 획득하는 것도 필요하다. 탄탄한 직업이 주는 안전망은 없지만 대신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로 그 기능은 충분할 것이라고 본다. 난 이런 방식의 성공이 확인되고 널리 퍼질수록 한정된 지위를 놓고 벌이는 무한경쟁과 강박적 불안은 줄어들고 각자의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가까워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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