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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삼동애 뵈옷닙고…』는 조식아닌 김응정의 작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삼동애 뵈옷닙고 암혈의 눈비마자/굴웁낀 벗뉘랄 쐰젹은 업건마난/서산애 해지다하니 그를 설워하노라.』
이것은 교과서인「고등국어I」에도 실려있는 유명한 시조로서 지은이는 조식으로 돼있다.
그런데 이 시조가 남명 조직이 지은것이 아니라 해암 김응정이 지은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단국대 진동혁교수(국문학)는 최근 『부언일부』란 고서한권을 입수, 내용물 검토하던중1690년(숙종16년) 오이건이 썼다는 「김해암가곡집서」의 내용을 살펴보다가, 지금까지 문학사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인물인 해암 김응정(1527∼1620년)이 당대 이름높은 시조작가였을뿐 아니라 명종의 승하를 듣고 지었다는 이 시조(이른바「서산일락지곡」)도 그가 지었다는 사실을 찾아내고 수소문 끝에 강진에 사는 후손들이 보관중인 『해암문집』중 8수의 새로운 시조속에서 이 시조를 찾아냄으로써 이사실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병와가곡집』, 이가원본 『청구영언』 『화원악보』등 시조집에는 이 시조가 조식이지은 것으로 돼있으나 조식의문집은 『남명집』에는 이 시조를 지었다는 두드러진 기록이보이지 않았다.
김응정은 관찰사 감의 5대손으로 문학과 충효를 함께 갖춰 존경받았으며 명종·선조 양군의 승하때 3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가곡집로 내고 송강 정철의 추천으로 경릉삼봉이 내려졌으나 취임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진교수는 「김해암가곡집서」가 쓰여졌던 당시는 해암사후70여년이 되던때인데 『선생이 지은 가곡이 1백분의1도 보존된것이 없다』고 기록한점으로 미루어 해암이 지은 시조는 수백수에 이를것이라고 지적하고 시조집 『청구영언』이 엮어진것보다 38년이나 먼저 엮어진 개인시조집의 서문이 나온 점도 국문학사상 의의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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