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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새물맞이 D -3] 박경리씨 특별 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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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몇 해 전 토지문화관에서 청계천 복원에 관한 세미나가 두 번 있었는데 참가자 중에 청계천 복원을 확신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아마도 없었지 싶다. 10년 후에나 혹은 20년 후에나 가능할지, 막연한 희망뿐이었다.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세미나를 주도한 연세대의 노수홍 교수를 위시하여 청계천살리기회의 회원들은 그 열정이 순수하고 미래를 근심하는 충정에 충만해 있었음에도 국토관리 문제에는 마이동풍인 정치적 현실 앞에 무원고립, 달밤에 도깨비와 씨름하는 꼴이었으며 오늘날 희소가치조차 사라져버린 소위 그 이상주의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어느 날 별안간 사태는 돌변했다.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면서 이명박씨가 서울시장으로 출마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역사가 바뀌었다는 말을 실감케 한 사건이었다.

어쨌거나 청계천은 지금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내었고 우리는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하는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고 보면 시비는 있게 마련, 청계천의 경우에도 갈등과 시비는 있었고 그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말의 하나, 청계천은 서울에 있는데 지방에서 웬 참견이냐, 지역이기주의적 발언이지만 그 오류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청계천은 대한민국 국토에 있는 하천이며 나아가 세계의, 아니 지구의 핏줄이기 때문이다. 핏줄 한 가닥의 소생은 도화선이 될 수도 있고 깃발이 될 수도 있다. 전국에 복개된 하천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청계천에 고기가 노닐고 새들이 찾아오는 기적 같은 사실에 국민들 인식이 달라졌으며 남의 나라에서도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그간의 소식도 들었다. 환경문제, 생태계에 관한 일만은 지역적 이기주의는 물론 국가나 민족성도 초월한 모든 생명의 공동과제인 것을 절대로 부인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강의 복원이 땅과 바다, 멸종 위기의 동식물, 혼탁한 공기와 찢어진 오존층의 복원으로 이어질 것을 진실로 우리는 염원해야 하는 것이다.

밤이 되면 청계천 다리들은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또 다른 멋을 뽐낸다. 박종근 기자

청계천 복원은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이 시장의 뱃심이 아니었던들 실현이 어려웠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며 사람들의 평가다. 그러나 그것은 꿈의 절반이 이루어졌을 뿐 유감스럽게도 절반은 흉물로 남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문화와 문명의 충돌이라 할 수 있겠는데 문화가 창조적인 것이라면 문명은 기술 분야로서 문화의 지시를 받는 것이 순리이거늘 문명이 문화를 깔아뭉개고 독주하면 생명은 메말라 버리고 세상은 사막이 될 것이며 미래에 대한 이 같은 예감은 결코 황당한 것이 아니다. 되살려놓은 청계천의 경우, 졸속이 빚은 결과라고들 하지만 문명의 구조물로 포위돼 있는 것이 더 심각하다. 강가에 조경은 필요 없다는 말을 전에도 했지만, 세월을 두고 주변을 단순하게 정리하고 생명의 자리를 넓혀나가야 할 것이며 소홀했던 역사의 복원도 지속돼야 한다. 고유의 문화를 잃는다는 것은 민족성을 잃는 것과도 같다. 세계는 각기 독특한 문화를 가진 민족으로 구성돼 있고 균형을 잡고 있는데 독창성을 상실한 민족은 결국 지구에서 죽은 세포가 되고 말 것이다.

나라의 도움이라곤 터럭만큼도 받은 바 없는 한말의 저 만주땅 연해주를 헤매던 우리 유민들이 양식을 털어서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했던 희생정신이 생각나는데 청계천 공사에도 많은 사람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으며 특히 영세한 노점상의 협조가 마음에 남는다. 시에서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처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지만 마지막 삶의 터전에서 물러날 때 그분들 심회가 어떠했을까. 항상 그와 같은 민초들에 의해 이 나라가 떠받쳐져 온 것을 우리도 가끔은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말이 나온 김에, 청계천 주변에 자리한 어느 정도 넉넉한 분들께 희생과 양보를 당부하고 싶은 심정이다. 개인의 이득만 챙긴다면 살아서 돌아온 청계천에 미안할 것도 같고, 그분들이 청계천을 신앙하고 보시하는 마음이 된다면, 연인같이 자식같이 사랑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떠날 때는 빈손인 것을. 망국적인 놀이터가 아니게 평화스러운 쉼터가 되게 그분들께서 지켜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청계천의 무궁함을 기원하면서.

박경리씨와 청계천
90년대부터 주장 '복원 산파'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문단의 원로 박경리(79)씨는 일찍이 "서울이 우리의 얼굴이라면 청계천은 그 중심인데 그 주변을 쓰레기통처럼 만들어 놓았다"고 역설하며 '청계천 복원의 산파역'으로 나섰다. 청계천 복원은 죽어가는 생명과 환경 복원의 시발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박씨는 2000과 2002년 자신의 근거지인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화관을 청계천 심포지엄 장소로 잇따라 제공하며 '공론(空論)' 에 그치고 있던 복원 논의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착공 직전 복원을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을 때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복원의 당위성을 재차 강조해 여론을 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근 건강 문제로 글쓰기를 극도로 자제해 왔던 박씨는 역사적인 청계천 복원을 앞두고 그 의미를 통찰하는 글을 흔쾌히 본지에 보내주었다.

'서민의 하천'
조선시대 빨래터로
6.25 땐 판잣집 즐비
70년대부터 상가 밀집

10월 1일 완전 복원되는 청계천은 조선왕조 이후 서민들의 애환을 보듬어온 하천이었다. 청계천은 서민들의 하수도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론 아낙네들의 빨래터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수표교.광통교 등 청계천 다리들은 각종 축제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청계천은 근세 이후 빈민들이 몰려들면서 일제가 붙인 이름(淸溪川)과 달리 암울한 생활고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으로 서울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 남산 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도성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연장 10.9km의 하천이다. 조선왕조의 임금들은 도성민의 생활에 밀착돼 있는 개천의 치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영조 때는 개천에 쌓인 토사량이 엄청나게 늘자 20만 명을 동원하는 대역사인 준천(濬川.하천 파내는 일) 사업을 벌였다.

일제시대 때부터 청계천 주변은 늘어난 오.폐수로 전염병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에 천변은 얼기설기 엮은 판자촌이 돼버렸다. 화장실도 없는 집에서 흘러나온 오물로 청계천은 더욱 더러워졌고 판잣집 주민들은 날씨가 맑으면 불날까, 굵은 비라도 오면 집 떠내려갈까 걱정해야 했다.

1958년부터 복개공사가 시작돼 77년에 마장동 신답철교까지 마무리됐다. 그 위에 청계고가도로도 건설했다. 3.1빌딩과 청계고가도로는 한때 한국 근대화의 상징물로 통했다.

하지만 복개된 청계천도 이내 대표적인 도심낙후지역으로 전락했다. 90년대 들어 청계고가도로와 복개구조물의 안전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아예 고가도로를 뜯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하자는 주장이 전문가들 사이에 나왔다. 2002년 민선 3기 서울시장 선거에서 청계천 복원을 핵심공약으로 내건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서 복원은 급물살을 탔다.

복원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던 서울시가 마주친 가장 큰 난관은 청계천 상인들의 반대였다. 생계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한 상인들은 '결사 항쟁'을 외치며 연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는 상인 이주 및 보상대책을 만들어 끈덕진 설득 작업을 벌였다. 이 시장은 "상인들과 4200번을 만나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결국 시가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2003년 7월 착공된 청계천 복원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돼 마침내 완공을 보게 됐다.

이재훈 기자 <ljhoo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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