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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투덜대지 않기 연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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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무래도 행복하지 않다는 불평불만의 신음과 악다구니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 사회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근대화가 가장 먼저 일어난 영국을 기준으로 열두어 세대에 걸쳐 이루어진 '전통'으로부터 '근대'로의 전환을 고작 네댓 세대 안에 소화해낸, 어느 사회학자의 표현대로 지극히 '압축적'인 한국 근현대사의 혼란과 소요를 짐짓 즐겨왔다. 자고 나면 새로운 사건이 기다리고 잠시만 딴전을 팔면 가차 없이 화제로부터 밀려나는 '투 다이내믹 코리아(Too dynamic Korea)', 그 바쁘고 즐거운 지옥이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에겐 자연스럽게 고뇌와 반성을 제공하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믿어왔다. 그럭저럭 재미있고 이러구러 박진감이 넘쳤다.

그런데 어느 순간, 최면에서 풀려난 듯 그 모두가 견딜 수 없어졌다. 소음과 악취, 넘치는 분노와 증오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던 연인의 얼굴이 천잡한 화장술의 조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처럼, 그동안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 더욱 당황했다.

사십이 되면/ 더 이상 투덜대지 않겠다/ 이제 세상 엉망인 이유에/ 내 책임도 있으니/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무조건 미안하다/ 아침이면 목 잘리는 꿈을 깨고/ 멍하니 생각한다/ 누가 나를 고발했을까/

한 달 전 인천공항을 떠나 밴쿠버로 향하는 밤 비행기 속에서 전윤호 시인의 시 '서른아홉'을 읽었다. 이제 나도 불혹이라는 사십 세를 목전에 두고 있으니, 세상이 엉망진창인 이유에는 내 책임도 얼마간 분명히 있을 테다. 누군가에게 고발당한 듯한 배신감 속에는 내가 누군가를 그렇게 고발했다는 환멸도 섞여 있을 테다. 더 나빠지기 전에, 더 미워하기 전에, 괴물과 맞서 싸우다가 괴물이 되어버리기 전에, 나는 열 시간 동안 비행하여 한국과 열여섯 시간의 시차가 나는 북아메리카의 넓고도 한적한 도시로 도망쳐왔다. 마침내 돌아가기 위해 기어이 떠나왔다.

좌충우돌의 초기 정착기간을 막 벗어나긴 했지만 아직은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생활'이라기보다 조금 긴 '여행'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방인이자 방관자인 채로 다른 문화로부터 빚어지는 다른 삶을 조금은 외롭고 나른하게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몸을 따라 좇지 못한 마음이 떠나온 그곳에 남아 있기에, 나는 시시때때로 사랑했던 사람들을 가만히 데려와 내가 경험하고 있는 낯선 문화와 낯선 삶 속에 놓아보곤 한다. 매일이다시피 술집에 모여 폭음을 하는 벗들은 술과 담배를 파는 곳이 따로 지정되어 있고 술집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이곳에서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집안의 전등이 고장 나도 팔을 걷어붙이길 차일피일 미루는 사람들은, 집수리와 장식이 일과이자 취미인 이들의 생활방식을 어떻게 생각할까? 거리마다 넘치는 첨단 유행의 멋쟁이들은 외양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맨 얼굴의 실용주의자들과 어떻게 어울릴까? '빨리빨리' 습성에 젖은 사람들은 신청한 지 열흘째 인터넷 모뎀도 보내주지 않고 우편물을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하는 이곳의 느려터진 서비스에 적응할 수 있을까?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는 사람들은 고인 물처럼 느리고 둔하게 흐르는 시간을 어떻게 이겨낼까?

나는 앞으로 한동안 '고독과 게으름은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에 의지하여 내가 선택한 다른 삶과 문화를 견뎌볼 작정이다. 그리고 예정된 날짜에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서른아홉의 막바지를 또다시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국에서 맞을 것이다. 나는 다만 다른 것을 다른 대로 받아들이고 낯선 것을 낯선 만큼 인정하는, 더 이상 투덜대지 않는 사십을 꿈꿀 뿐이다.

김별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