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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7)김창용의 입대-제79화 육사졸업생들(12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김창룡이 해방을 맞은 것은 만주 홍화에서였다.
소련군이 진주하고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김창룡 소속의 헌병부대도 해산했다.
김창룡은 포로가 되지않기 위해 사복으로 갈아입고 귀국, 고향 영흥으로 갔다.
거기서 도상원이라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김창용의 나이 29세였다.
도여인은 김창룡이 1941년 정식으로 관동군 헌병대에 편입되어 부임한 소만국경지방의 하이라루(해위이)의 적십자병원 회계로 있다가 김창룡과 알게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후 어디에서나 그랬듯이 북한에서도 귀국한 동포들은 끼니를 댈수가 없었다.
김창룡도 그런 고생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45년 10월 철원에 있던 옛 친구 김윤원을 찾아갔다.
김윤원은 김창룡이 관동군에있을 때 헌병 정보원으로 데리고 있던 청년이었다.
김창룡은 그에게 베풀어준것이 있어 그를 믿고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김윤원은 김창룡을 고발하고 말았다.
당시 철원은 38선 이북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고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조직되어 치안책임을 맡고 있었다.
김창룡은 친일반동분자로 철원 보안서에 수감됐다.
보안서원이 심한 매질과 전기고문을 가하면서 김창룡의 과거를 캐물었다.
김창룡은 끝내 과거를 숨기다가 소련군 장교에 의해 사형이 선고됐다.
45년 11월15일이었다.
그러나 사형을 즉각 집행하지 않고 함흥으로 이감시키는 것이었다.
김창룡은 『시베리아로 끌려가나 보다』고 생각하면서 탈출을 결심했다.
그는 화물차에 실려가다가 함흥 직전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거기서 그는 시체처럼 위장하여 달구지에 실려 타고 다시 고향으로 갔다.
집에 숨어 상처를 치료하며 월남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가 또 체포됐다.
거기서 다시 재판을 받아 역시 사형선고를 받았다.
46년4월이었다.
그는 영흥 금융조합 자리에 갇혀 있다가 간수가 없는 사이에 소련군 중위를 의자로 때려 실신시키고 탈출했다.
집에 연락하여 부인을 나오게 한후 평양으로 잠입했다가 다시 걸어서 남천에 있는 처가로 갔다.
김창룡이 개성부근에서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한것은 5월초순이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고 맞아줄 사람도 없었다.
당시는 군영반 출신들이 한창 창군요원으로 뛰고 있었고 사관학교에선 1기생들이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관동군에 있다가 귀국하여 군영반을 나온 박기병소위는 경비대 사령부부관으로서 원용덕장군을 모시고 있었다.
당시 새로 임관된 신임장교들은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각지의 부대(주로 창설연대)로 가게되어 있었다.
경비대의 한국인 사령관이던 원용덕장군이 대개 직접 용산역에 나가 그들을 환송했는데 어느날 원장군이 일이 있어 박기병부관이 대신나가게 됐다.
그때 누가 『「도요시마」(풍도)형!』하고 불렀다.
「도요시마」는 박기병소위의 창씨명이었다.
박소위가 돌아다보니 김창룡이 거적을 깔고 앉았다가 일어서서 달려오고 있었다.
『이거 「다마시마(왕도)」아닌가. 이게 웬일이야』
박소위와 김창룡은 관동군에 있으면서 서로 창씨명만 알고 지내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수 밖에 없었다고한다.
박소위가 『이젠 우리도 나라를 찾았으니 일본명을 버리고 우리 이름을 부르자. 내이름은 박기병이다. 네 이름은 무엇인가』해서 새로이 통성명을 했다고 한다.
그때 김창룡은 얼굴에 상처가 그대로 있었고 며칠째 먹지도, 세수도 못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박소위는 김창룡을 데려가 목욕을 시킨다음 장래문제를 의논했다.
『앞으로 너 무엇 할래』
『공산당 잡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하겠다』
『그러면 경찰이나 군대다』
『군대를 하겠다. 그래야 쳐들어가 복수를 하지』
박소위는 원장군에개 말해 김창룡을 군에 임대시키기로 했다.
당시 모집중인 부대는 부산의 5연대뿐이었다.
그때 5연대장은 백선엽중위였다.
박소위의 추천으로 김창룡은 5연대에 입대됐다.
46년말 육사2기생 모집이 있을 때였다.
김창룡은 이에 응시키로 했다.
그러나 육사에 응시하려면 먼저 연대의 추천을 받아야했다.
당시 연대 부관 (인사담당) 은 학병 출신의 백남권소위(군영)였다.
백소위는 김창룡에 대해 불합격 판정을 내려 버렸다.
일본군 헌병출신이기 때문에 장교가 돼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고 한다.
불만에 가득찬 김창룡은 부대를 이탈하여 서울로 왔다.
박기병소위를 찾아간 것이었으나 박소위는 이미 이리의 제3연대에 전출되어 있었다.
김창룡은 다시 이리로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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