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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제조 경쟁 불필요…R&D로 이겨야 IT 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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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길남 한국과학기술원(KAIST) 명예 교수. [사진 중앙포토]

국제 축구 무대에 FIFA(국제축구연맹)가 있는 것처럼 인터넷 분야에는 ISOC(Internet Society)라는 국제기구가 있다. 인터넷 공공정책과 보급, 기술개발 등을 돕기 위해 1992년 설립됐다. ISOC는 설립 10주년이던 2012년, '인터넷 명예의 전당'을 만들고 전세계 인터넷 형성과 보급에 기여한 개척자 30명을 헌액했다. 월드와이드웹(www)을 만든 팀 버너스리, 인터넷 통신규약(TCP/IP)을 만든 빈트 서프, 리눅스를 만든 리누스 토발즈 등 정보기술(IT) 대가들이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한 이가 있다. '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길남(71) 한국과학기술원(KAIST) 명예 교수다.

성탄 캐럴이 울려퍼지던 지난달 25일 중앙SUNDAY는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전 박사 자택을 찾았다. 작은 골목이 많고 오르막이 심한 평범한 주택가에 지은 지 오래돼 보이는 연립주택이었다. 전 박사는 스티브 잡스를 연상케 하는 청바지에 터틀넥 티셔츠 차림으로 아내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와 함께 취재진을 맞았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한 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전 박사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1979년 2월 귀국했다. 그리고 2년 3개월 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 구축에 성공했다. 그의 귀국을 놓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부탁을 했다", "대통령보다 월급을 서너 배 더 주라고 지시했다"는 등 풍문이 많았다. 사실 관계부터 확인했다.

NASA 근무하다 귀국해 컴퓨터 개발

-귀국을 누가 어떤 조건으로 제안했나.

"정부 관계자가 직접 연락해 온 것은 아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76년에 국책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방문했다. 결혼을 앞둔 때였다. 장인어른과 친분이 두터웠던 KIST의 이용태 박사(훗날 삼보컴퓨터 회장이 됨)가 나를 초청했다. 미국서 공부하고 NASA에서 근무한 친구 사위가 온다고 하니 이 박사가 만나자고 한 것이다. 당시 한국이 해외에서 공부한 과학자를 300~400명 유치하던 때였다. 이 박사는 부서장으로 나는 책임연구원으로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에서 함께 근무하게 됐다. 좋은 조건을 제공받은 건 사실이다. 여의도 전세 아파트와 기사 딸린 차가 나왔다. 다른 대학 교수들보다 월급을 2~3배 더 받았다. 그러나 아파트는 답답해서 1년 만에 나왔고 기사도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 고용하지 않았다."

-어떤 임무를 부여받았나.

"당시 삼성·금성·대우가 컬러TV를 막 만들고 VTR을 만들까말까한 수준이었다. 선진국 기술을 감안할 때 한국에서 4가지 정도가 가능했다. 컴퓨터 국산화, 컴퓨터끼리 연결(인터넷), 우주선과 지상 컴퓨터의 연결, 이동 컴퓨터 통신이었다. 이 중 컴퓨터 국산화와 인터넷 연결은 한국에 필요한 일이었고 나머지는 급하지 않았다. 컴퓨터 개발 업무가 내게 주어졌다. 정부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어야 반도체 산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전산을 전공했지만 나는 엄밀히 컴퓨터 개발보다 네트워크 전문가다. NASA에서 한 일도 우주선 컴퓨터와 지상의 컴퓨터를 연결하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컴퓨터 개발과 인터넷,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다."

-인터넷 연결에 성공하던 82년 가을에 KAIST로 옮겼는데.

"한국사회는 선·후배,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곳이다. 나처럼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나마 대학사회에서나 공존이 가능했다. 문제는 한국 대학사회가 교수 이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KIET라는 중립적인 연구기관에 2년 정도 있다가 학교를 택해 옮길 생각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서울대 교수로 갔으면 한국에 인터넷이 안 생겼을 것이다. 인터넷 개발 비용을 학교 재정으로는 지원하기 어려웠으니 강의만 했을 것이다. 컴퓨터가 최소 두 대는 있어야 연결할 텐데 당시 컴퓨터 한대에 50만 달러정도였다. 지금 가격으로 환산하면 수십억원인 셈이다. KIET에서 인터넷 개발에 성공하던 당시 내 직책이 부장이었다. 그런데 부장과 소장 사이에 아무도 없었다. 자칫 소장을 맡게 생겼더라. 기업에 도움을 주는 개발 업무가 중요한지, 최첨단 분야 연구가 중요한지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해야 했다."

가난한 조국에 인재 많아 깜짝 놀라

-KAIST를 선택한 까닭은.

"귀국해서 가장 놀란 게 가난한 조국에 인재들이 무척 많다는 점이었다. KIET 연구원 중에 실력파들이 무척 많았다. 학력을 물어보니 대부분 '학부 서울대, 석사 KAIST'라고 대답하는 거였다. 그래서 KAIST를 알게 됐다. 미국 수준의 박사 만드는 일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뛰어난 과학자를 길러내느냐 하는 일은 평가가 간단하다. 미국 일류 박사들이 MIT나 스탠퍼드의 교수가 된다. KAIST 출신의 MIT·스탠퍼드 교수를 만들고 싶었다."

-후학들 중에 김정주·송재경·정철처럼 성공한 벤처인들이 많다.

"MIT 연구교수가 될 뻔한 학생이 있었지만 창업을 한다고 해 말리지 않았다. 내 연구실에는 창업을 권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대기업에 '이런 거 해야 한다'고 설득하느니 벤처를 만들면 간단하게 도전할 수 있었다. 운영체제(OS)를 연구하던 학생도 1년 정도만 더 매진하면 성공할 듯 했는데 연구실 선배와 벤처를 차렸다. 그 때문에 리눅스 개발을 핀란드에 빼앗겼지만 대신 그 벤처가 소니에 텔레비전 기술을 팔았다. 다른 측면에서 기여를 한 것이다."

-IT 코리아라는 말을 들을 때 감회가 남다르겠다.

"인더스트리 레벨에서 세계 최고가 가능하다는 것을 삼성이 반도체와 스마트폰으로 보여줬다. 다만 우리 IT 미래를 삼성에 너무 기대선 안 된다. PC는 IBM이 휩쓸었지만 지금 포기했다. 그렇다고 IBM을 형편없는 회사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당시에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사업을 한 것이다. 휴대폰도 모토롤라·노키아가 앞서갔지만 지금은 아니다. 스마트폰은 휴대전화와 컴퓨터의 중간에서 삼성이 잘할 수 있는 분야였다. IT 쪽에서는 특정 기업이나 인물이 계속 톱을 차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삼성이 1등을 유지하려 뛸 테지만 다른 1등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HW·SW·UI에서 1등 계속 나와야

-다른 1등은 어떻게 해야 나오는가.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구글의 래리 패이지, 애플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한국에서 나와야 한다. 이제는 IT 선진국다운 게임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살 길은 제조 대국이 아니라 개발자가 많은 나라를 지향하는 것이다. 판교에 가봤더니 환경이 좋더라. 이런 테크노 밸리가 10개 정도는 돼야 한다. 중국과 불필요한 경쟁하지 말고 제조업이 아닌 개발자 중심의 나라로 변신해야 한다. 개발 분야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데이터·UI(사용자 환경) 등 모두 중요하다. "

-IT강국의 위상이 예전같지 않다.

"제자 중에 매우 뛰어난 학생이 있었다. 국내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소통이 안 되더라며 나왔다. 그리고 구글에 입사했다. 이 제자는 현재 구글이 추진하는 해저케이블 프로젝트에서 핵심 인력으로 일하고 있다. 선진국으로 가려면 인재 없이 불가능하다. 내가 귀국하던 시절은 인재를 모으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인재들이 나가는 시대다. 정반대가 됐다. 이래서 어떻게 미래가 있겠나. 저커버그가 넥타이 매고 백악관에 가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는 사진이 자주 보도된다. 우리나라 벤처 거물들이 대통령을 만나서 '이런 이런 거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나. 머리를 써서 이기는 나라가 돼야한다. 판교 같은 곳을 10배로 키우고 젊은 브레인을 모아야 한다"

박태희 기자 adonis5@joongang.co.kr

▶전길남 박사는
일본 오사카대 전기공학 학사, 미국 UCLA대학원 석·박사를 마친 뒤 NASA연구원으로 일하다 79년 귀국했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인터넷 개발에 성공한 뒤 KAIST 교수를 지냈다. 2008년엔 중국 칭화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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