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⑩국제] 93. 외국어 광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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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에 한 영어학원에서 취학 전 어린이들이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면서 알파벳 발음을 따라하고 있다. <중앙포토>

올해 53세인 박우갑씨는 중국 충칭(重慶)에서 오토바이 제조업체의 전문경영인으로 일하고 있다. 2년 전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한 뒤 찾은 ‘이모작 인생’이다. 젊어선 20여 년간 일본ㆍ미국ㆍ남미 지역의 수출을 담당했다. 모두 영어ㆍ일본어에 능통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퇴직 직전 중국어를 공부해 3개 외국어를 구사한다.

박씨는 1965년 중학교 입학 때 처음 영어를 접했다. 사전에서 일일이 발음기호를 찾아 어설프게 배웠다. 고교 시절에는 대학 입시를 목표로 문법ㆍ독해에 매달렸다. 대학에선 타임ㆍ뉴스위크반, AFKN 청취반 등에 들어갔다.

65년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이후 직장인에게 일본어는 필수였다. 5∼6년 전부터 중국어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영어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과거 40년간은 개인에게도 국제화가 요구됐던 시대였다. 외국어는 영원한 숙제였다. 특히 영어는 정복의 대상이자 한(恨)이었다. 영어를 못해 대학 입시에서, 직장 채용ㆍ승진 시험에서 쓴맛을 봤던 사람이 부지기수다. 중학교 때부터 10년간 영어를 공부하고도 외국인 앞에선 입이 얼어붙는다. 그래서 영어를 둘러싼 ‘괴담’이 유독 많다. 영어사전을 한 장씩 외운 뒤 씹어 삼켰다는 실화부터 영어 발음을 좋게 하기 위해 어린 자녀에게 혀 수술을 시키는 부모의 이야기까지.

영어 학습서는 한국전쟁 이후 본격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A W 메들리가 쓴 『삼위 일체』가 70년대까지 인기를 누렸다. 60년대에는 안현필의 『영어실력기초』 『영어기초 오력일체』가 필독서였다. 70년대에는 송성문의 『성문종합영어』.

중ㆍ고교 학생들은 이런 책을 몇 번 뗐느냐를 자랑했다. 70년 영어 회화 교재 『English 900』에 원어민 음성으로 녹음된 테이프가 나와 히트했다. 83년 영어 학원에 원어민 강사가 처음 등장해 소위 ‘프리 토킹’식 회화 강의를 선보였다.

90년대 기업체가 신입사원 채용 때 영어 공인 시험 성적을 요구하자 대학 도서관마다 토플(TOEFL)ㆍ토익(TOEIC) 책이 쫙 깔렸다. 대학생들은 어학연수를 위해 해외로 몰려나갔다. 연수 붐은 초등학생에게까지 확산됐다. 엄마 뱃속에서 영어 동요 테이프를 듣고, 걸음마를 시작하면 영어 비디오 테이프로 기초를 다진다.

영어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CNN청취반, 영어 에세이반이 줄줄이 기다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해외에 가지 않고도 어학연수 효과를 내준다”며 각 지방자치단체가 ‘영어체험마을’을 만들었다. 서울시와 경기도 안산시가 지난해 문을 열었고 부산ㆍ인천 등도 추진 중이다.

초ㆍ중ㆍ고교 자녀들을 미국ㆍ캐나다 등으로 유학 보내는 가정이 많아졌다. 말레이시아ㆍ인도ㆍ싱가포르ㆍ필리핀 등도 연수 대상지로 떠올랐다. 97년 초등학교 4학년 교과 과정에 영어가 포함되면서 조기 교육은 과열 양상으로 번졌다. ‘영어를 못하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논리 아래 ‘영어 공용어 채택론’이 힘을 얻었다.

90년대 후반엔 중국어가 급부상했다. 90년대 초 한때 러시아어가 반짝 특수를 누렸으나 금세 시들고 말았다. 요즘엔 각 대학의 중문과 합격선이 영문과를 앞지르고 있다. 직장인 사이에서 중국어 열기는 폭발적이다. 중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수요 때문이다. 그 바람에 고교 시절 제2외국어로 배웠던 독어ㆍ불어는 교과 과정에만 남은 ‘박제 외국어’가 돼 버렸다.

박현영 기자

인터넷 일상화 … 더 커지는 ‘외국어의 힘’

영어 실력은 종전까지 말과 글을 구사하는 의사소통 능력을 뜻했다. 국내에 오는 외국인을 만나거나 해외에 물건을 팔기 위해 한국어를 영어로, 영어를 한국어로 옮겼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이 구사하는 외국어에 따라 정보량 자체가 달라지는 시대다. 초고속 통신망 시대를 맞아 인터넷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인터넷 세계의 ‘공식 언어’인 영어의 위력이 훨씬 커졌다.

30대 회사원 민승기(32)씨는 최근 미국의 온라인 서적 판매업체인 아마존닷컴에서 책 한 권을 사서 경기도 분당 집으로 배달받았다. 외국계 회사 입사 준비에 필요한 면접 준비서였다. 아마존닷컴은 한국어 사이트를 운용하고 있지 않아 책 검색부터 대금 결제까지 모든 것을 영어로 끝내야 했다.

대학원생 김현정(26)씨는 해외 유명 대학의 온라인 도서관에 수시로 드나든다. 여기에 각종 데이터베이스(DB) 검색사이트를 이용해 미국ㆍ유럽의 명문대학에서 발행하는 논문을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활용한다. “자료 수집차 외국에 간다”는 말은 옛날 얘기가 됐다.

외국어 구사 능력과 인터넷의 만남은 개인의 생활 패턴을 급속도로 바꾸고 있다. 안방에 앉아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의 최신 뉴스를 읽는다. 해외 쇼핑 사이트에 들어가선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고급 백화점의 매장 물건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서울에 살면서 뉴욕ㆍ도쿄(東京)ㆍ베이징(北京)의 지구촌 소식과 트렌드를 즐긴다.

과거 편지로 우정을 나누던 해외 펜팔도 인터넷으로 옮겨왔다. 국제적인 ‘친구 만들기’사이트에 접속하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취미와 관심사를 함께하는 친구를 만날 수 있다. 관심을 갖고 있는 언어로 채팅하고 e-메일을 쓰면서 서로의 외국어 교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온라인과 인터넷 폰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세상이다.

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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