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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장관급 회담 결산] 분위기는 화해, 레퍼토리는 옛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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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남한 쌀 배급받는 북한 주민
정부는 북한에 대한 쌀 지원이 10만t씩 완료될 때마다 우리 측 인원이 북한 지역에서 분배 현장을 확인한다는 남북 간 합의에 따라 14일 개성과 고성 지역에서 현장 확인을 했다. 사진은 식량공급소에 쌓여 있는 쌀 부대(사진위)와 쌀을 분배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 [통일부 제공]

금강산 관광 문제가 일단 한숨을 돌렸다. 북측이 장관급 회담 남측 수석대표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금강산 관광이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북측 이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의 만남도 주선됐다.

정 장관은 북측 대표단과의 일상적인 접촉 외에 14일 밤 대남 실세인 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을 따로 만나 이 같은 윤곽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15일 맑고 선선한 날씨 속에 묘향산으로 '가을 여행'을 떠났던 정 장관은 평양에 돌아오자마자 회담장의 기자실을 찾았다. 그리고 발등의 불인 금강산 문제에 대한 논의 결과를 발표했다. 먼저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막을 뜻도 없다"는 북측의 입장을 소개했다. 현대그룹 현 회장이 '국민 여러분께 올리는 글'에서 "현대의 대북 사업이 기로에 섰다"고 밝힌 이후 처음 나온 북측의 공식 반응이다.

정 장관은 ▶금강산 관광 규모 축소 등 북측 조치에 남측 여론이 나빠졌고▶남북 경협의 상징인 금강산 관광의 파행은 북측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북측은 "금강산 관광에서 김윤규 부회장의 공로가 컸다" "현대 내부의 문제로 금강산 사업이 차질을 빚게 돼 매우 실망했으며 현대의 사업의지마저 의심했다"는 표현으로 평양 내부의 격앙된 분위기를 전달했다.

결국 초점은 이번 파문의 시발점인 '김윤규 문제'가 현정은-이종혁 담판에서 어떻게 처리되느냐로 좁혀진 셈이다. 금강산 관광 갈등을 봉합한 것은 제16차 장관급 회담의 최대 소득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번 회담이 베이징 6자회담이나 북한 핵문제 해결의 '배후기지'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는 진작 물건너갔다. 또 납북자 생사 확인이나 장성급 회담 재개 등의 합의가 이뤄질지도 불투명하다. 남북은 밤늦게까지 공동 보도문 타결을 위해 머리를 싸맸지만 뾰족한 내용을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 미국과 일본의 대북 메시지='북.미 관계 정상화에 대한 미국의 의지는 분명하다. 의심하지 마라. 미국은 6자회담에서 실질적인 진척을 희망하고 있다. 6자회담이 북.미 신뢰를 위한 좋은 기회다. 합의를 위해 노력하자'. 정 장관은 12일 서울에서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 대표가 건넨 이런 내용의 대북 메시지를 북측에 전달했다. 북측은 "상부에 보고하겠다. 회담 진행에 반영하겠다"는 답을 내놓았다.

핵문제에 관해선 회담 기간 내내 시큰둥했던 반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이런 메시지가 베이징 6자회담에 실질적 효과를 미칠지는 미지수다. 정 장관은 "정부 간 대화를 재개해 북.일 관계 정상화 문제를 협의하자"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메시지도 전했다. 북한은 묵묵부답이었지만 정 장관은 "북.일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 김일성 밀랍상에서=남북 대표단 전원은 가을 여행의 행선지로 묘향산에 마련된 국제친선전람관을 찾았다. 김일성 주석이 178개국 인사들에게서 받은 21만9370점의 선물이 전시된 7만여 평의 넓은 공간이다. "전시물 보존을 위해 섭씨 18~20도의 온도, 48~58%의 습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는 북측 관계자의 말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북측 관계자는 김 주석의 밀랍상에 고개를 숙여 조의를 표했다. 그러나 정 장관 등 남측 대표단은 별다른 표정이나 행동변화 없이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등 남측 관계자들의 선물도 있었고, 김 주석이 일제 때 보천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내용을 담은 동아일보 호외 기사 동판이 눈에 띄었다.

◆ 무드는 화해, 레퍼토리는 흘러간 옛노래="우리 겨레에 커다란 추석 선물을 안겨주자"는 남북한의 다짐과 달리 본론에선 별 수확이 없는 회담이었다. 금강산 관광 문제가 핫 이슈로 떠오르면서 다른 현안들은 뒷전으로 밀렸다.

당초 남측은 이번 회담에서 한반도 평화문제를 집중 제기해 6자회담을 측면 지원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6자회담이 난항을 보이면서 이 논의는 제자리걸음을 했다. 특히 북한이 국가보안법 철폐와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단 등 상투적 주장을 늘어놓으며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평양이 베이징에 영향을 주기보다 베이징에 오히려 영향받는 모양새였다. 남측이 제기한 이슈도 '재탕 삼탕'식 제안이었다. 특히 남북 상주대표부 설치 문제는 북측이 안 받을 것을 알면서 의례적으로 내민 카드에 불과했다는 평을 받았다.

평양=공동취재단, 박소영.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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